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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용서] 11왕상11; 37-43 아들이 아버지처럼 용서를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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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왕상11; 37-43 아들이 아버지처럼 용서를 받음_1

 

 2013.10.27.주.주일오전.

 

*개요:    54용서, 1역사서, 4극본, 5은혜-7실천

 

37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38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39    내가 이로 인하여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한지라

40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의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

41  솔로몬의 남은 사적과 무릇 저의 행한 일과 그 지혜는 솔로몬의 행장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42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린 날 수가 사십년이라

43   솔로몬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부친 다윗의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탕자의 비유에는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으나 나중에는 아버지를 떠난 큰 아들과 처음에는 아버지를 떠났으나 나중에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온 작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로 인해 즐거워하며 떠나는 아들로 인해 근심하시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완전히 대비되는 두 아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이 각각 아버지에게 어떻게 보여졌는가 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미를 알게 합니다. 큰 아들이 우리들에게 닮지 말아야 하는 모습으로 다가 온다면 작은 아들은 우리들에게 닮아야 하는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닮지 말아야 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닮아야 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속에서 우리는 압살롬이라는 큰아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작은 아들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다윗왕의 또 다른 아들인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다른 다윗의 아들 보다도 더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가장 고통 중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왜 다윗이 가장 고통 중에 낳은 아들인가 하면 다윗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그 죄로 인해서 괴로운 심판을 받았으며 마침내 용서하심 가운데 돌아왔을 때 낳은 아들이 바로 솔로몬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왕은 아내들이 많이 있었지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보고 음욕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간음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밧세바가 임신을 하자 남편인 우리야를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에 내보내서 전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하여 들였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다윗이 아무리 위대한 왕이었고 놀라운 일을 행하였으며 존경받는 일을 했다 하더라도 그가 저지른 이 끔찍한 일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왕에게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그의 처벌하심이 분명히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일로 인해서 다윗의 집에 여러가지 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그의 처들이 다른 사람에게 겁탈을 당하게 되며 둘 사이에 낳았던 아이는 죽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곧 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병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엄정한 심판 앞에서 다윗은 회개하고 또 회개했습니다. 또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심지어는 식음을 전폐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단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해 주신대로 아이는 결국 칠일 만에 죽었습니다. 이러한 죄의 심판과 댓가의 아픔과 고통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다윗은 다시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솔로몬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기 앞서 태어났다가 일찍 죽었던 그 불행했던 형제와는 달리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과 처벌을 통과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고 또 구했으며 그 용서받음의 증거로 다시 아들을 주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아이는 데려가셨으나 이 두 번째 아이는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모가 하나님의 행하시는 모든 심판과 처벌 속에서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바로 심판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을 붙들었고 하나님께로 더욱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받으셨고 그로 인해서 두 번째 아들인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실로 솔로몬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표적으로  다윗왕이 받은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다윗왕의 용서의 표적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왜 솔로몬이 집을 떠난 작은 아들에 해당하는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죄를 지은 것은 다윗왕이고 용서받은 것은 다윗왕이지 솔로몬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솔로몬은 그의 충성스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더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여러 아들들 중에서 특별히 다윗이 왕으로 세워주어서 다윗의 뒤를 잇는 왕이 되었습니다.

“왕상1: 33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의 신하들을 데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인도하여 내려가고 34 거기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너희는 뿔나팔을 불며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고 35 그를 따라 올라오라 그가 와서 내 왕위에 앉아 나를 대신하여 왕이 되리라 내가 그를 세워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치자로 지명하였느니라”

 

이렇게 특별한 사랑을 입어 왕이 된 다음에 그는 자기의 할 일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왕이 사랑하였고 섬겼던 그 하나님을 동일하게 자신도 정성을 다해 섬겼습니다.

“왕상3: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11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왕이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지혜와 부귀와 영광을 갖는 최고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정말 사랑을 받을 만하게 했습니다. 아버지 다윗왕에게도,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도 그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백성들에게도 사랑을 받았습니다. 솔로몬의 재판으로도 유명한 사건인 두 여자가 한 아기를 놓고 서로 자기가 어머니라고 하는 소송에 있어서도 그는 사람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완벽한 지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높였습니다. 그냥 아버지가 왕이라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지혜와 축복을 가진 위대한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이 애초에는 너무나 사랑받는 아들이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만약 그 작은 아들이 그렇게 대우받지 않았다면 그가 자신있게 아버지에게 자신이 받을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유산은 법적으로 받아야 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니까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십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자꾸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해야 하야만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시점은 결코 미래가 아니라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잘 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하지 못했어도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사랑받는 자입니다. 사랑을 받아야 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육체가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이 육체를 만들려고 하면 얼마나 드는 줄 아십니까? 어떤 경우는 아무리 돈을 주어도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마음이 얼마나 귀한 줄 아십니까? 그 마음은 구원받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이 있어도 갈 수 없는 그곳에 바로 우리가 갈 수 있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줄 아십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고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자들이 바로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말해도 믿지 않을 천국의 이야기를 자신의 부모에게 자신의  형제에게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도 사랑받는 자녀로서 그렇게 행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이 되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던 하나님의 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을 7년동안 걸려 완성하였습니다. 열왕기상 6장 1절입니다.

“왕상6: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왕상6: 38    열한째 해 불월 곧 여덟째 달에 그 설계와 식양대로 성전 건축이 다 끝났으니 솔로몬이 칠 년 동안 성전을 건축하였더라”

 

그리고서 성전안에 언약궤를 옮기는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였습니다.

“왕상 8: 10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11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이로 인해서 그들은 기뻤고 가슴이 벅찼으며 감사함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전부 솔로몬왕이 앞장서서 이루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힘을 모았던 백성들과 멀리서 와서 도왔던 히람과 이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랬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왕의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11장 1절입니다.

“왕상11: 1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2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솔로몬왕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처럼 직접 어디 멀리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갔습니다. 그가 성전을 건축하고 자기를 위해서 궁을 짓고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그녀를 위해서 궁을 지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의 많은 여인들을 사랑하기 시작해서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을 때에는 완전히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솔로몬은 그 모든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고 궁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에게나 백성들에게나 점차 죄를 짓게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 악한 것은 솔로몬이 하나님만을 섬긴 것이 아니라 그 이방여인들의 신까지도 섬겼다는 점입니다.

“왕상11: 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 7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8 그가 또 그의 이방 여인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그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이제 솔로몬은 진정으로 작은 아들에 해당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탕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의 그 지혜로움과 부귀와 영광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그는 무기력하며 얽매이고 소진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너무나 많은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에게는 후궁이 칠백인이 있었고 첩이 삼백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키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탕자가 수많은 친구들에 둘러싸여 결국 빈털털이가 된 것처럼, 솔로몬도 그렇게 수많은 여인들에 둘러싸여 빈털털이가 되었습니다. 그 풍성함이 결국 빈털털이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처음에 읽었던 그 말씀이었습니다.

“왕상11:37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38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이 말씀은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의 ‘너’는 여로보암이었고 그는 솔로몬에게서 열 지파를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솔로몬은 그 아들 르호보암때에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만 남고 모든 나라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세상에서 우리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많은 사랑하는 것들로 인해서 그 풍성함을 다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사람들의 존경함을 잃어버립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사랑하는 것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세상에서 우리는 사랑받지 못해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너무나 많은 세상의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목마르고 그래서 괴롭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거기에 얽어매게 됩니다. 돼지가 먹는 주염열매를 먹던 탕자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솔로몬은 그렇게 그의 인생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이 정말로 탕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돌이켰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켰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는 솔로몬의 마지막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41  솔로몬의 남은 사적과 무릇 저의 행한 일과 그 지혜는 솔로몬의 행장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

 

그의 지혜는 솔로몬의 행장에 기록되었다는 말 그래도 그는 잠언과 전도서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 전도서의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 부분에는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왔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1: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전12: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다음 사람들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한 마디를 했습니다. 그의 전 인생을 통틀어 더 많은 말을 하지 못한 것은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한 마디를 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돌아온 그를 기뻐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죽기전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왔을 때 그는 아버지 다윗이 용서함을 받은 것처럼 용서를 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 다윗도 간음을 하고 살인을 하고 부인을 했었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와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 와중에 낳은 아들인 솔로몬도  그렇게 용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단지 용서의 증표로 태어난 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탕자의 회개와 탕자의 귀환과 탕자의 고백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비록 우상숭배를 하고 이방여인을 사랑하고 나라를 잃기는 했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결국엔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아버지 다윗이 용서를 받고 아들 솔로몬이 용서를 받은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받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다윗의 잘함과 또한 다윗은 악함을 봅니다. 또한 솔로몬의 잘함과 그의 악함을 봅니다. 그리고 잘한 일과 악한 일의 경중을 따져서 그가 결국 선인이었는가, 악인이었는가를 구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모두가 다 악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던 다윗도, 놀라운 지혜를 받아 영광의 성전을 건축했던 솔로몬도 그의 악함을 생각해보면 결국엔 악인이 되고 맙니다. 우리 자신도 악한 일을 하나 하나 따져보면 결국 다 악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악함 속에서 하나님께로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살기 때문입니다. 탕자에 대해서 그 아버지가 말했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은 자’라는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 회개한 탕자가 됩니다. 

 

여러분 혹시 호주의 역사를 아십니까? 영어로는 오스트레일리아라고 하는 이 호주라는 나라는 17세기 유럽인들에게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1770년부터 영국이 자신의 식민지를 삼았고, 1788년부터는 영국의 죄수들을 수용하는 유배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1868년까지 호주에는 약 16만명의 죄수들이 호송되었고 그곳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죄수들 이외에 그곳에는 원주민도 있었고, 죄수가 아닌 단순 이주자들도 있었지만 이 나라는 오히려 유배식민지로 더 알려져 있었습니다. 어쩌면 죄수였다는 사실이 기분나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죄인이라는 부끄러움보다 대영제국의 신민이라는 자부심이 더 컸기 때문에 그들은 영국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래서 호주국기에는 영국국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용서받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용서를 받고자 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다윗도 그랬고 솔로몬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온 다윗과 솔로몬이 탕자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며 그분께로 돌아옵시다. 그래서 늘 우리의 지난 날을 부끄러워하며 항상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기를 사모하는 자들이 됩시다. 하나님은 오직 그렇게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십니다. 나중에 주님은 죽은 자도 다 살리시고 잃어버린 것도 다 되찾으시기 때문에 주님 안에 있는가 주님 밖에 있는가 하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직 우리의 영혼만 주님께로 오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용서하시는 주님 바라보면서 주님께 진정으로 용서받는 탕자로 돌아오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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