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말씀하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여
가로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붙여 주셨나이다
29 왕이 가로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1)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30 왕이 가로되 물러나 곁에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섰더라
31 구스 사람이 이르러 고하되 내 주 왕께 보할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지금까지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두
아들의 비유를 다 살펴보았습니다. 그 두 아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이었으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는
이 두 아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끊임없이 작은 아들에 해당하는 사람이 나오고 큰 아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다윗왕에게도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압살롬이라는 아들의 모습은 여러가지 면에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온 두 아들 중의 하나를 닮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살펴볼 압살롬이라는 아들은 과연 두 아들 중에서 누구를 닮았을까요? 그는 탕자였던 작은 아들에 해당할까요, 아니면 집을 지켰던 맏아들에
해당할까요? 이제 압살롬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그가 과연 두 아들 중에서 누구를 닮았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압살롬이라는 사람이 다윗에게 어떤 아들이었는지를 생각해봅니다. 그는 다윗이 그술왕 달매의 딸 마아가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시기적으로 다윗이 압살롬을 얻게 되었을 때에는 사울왕으로부터의
피난생활을 끝내고 헤브론에서 왕이 된 다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러모로 평안하고 안정된 상태에서 아들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압살롬은
아름다움으로 이스라엘 전체에서 크게 칭찬받는 자였습니다. 정말 왕자다웠고 품위와 기품이 있었습니다. 특히나 그의 머리털은 무거워서 년말마다 깎았고
그 머리털을 깎을 때에 재어보니까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나 했다고 했습니다.
“삼하14:25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26 그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년말마다 깎았으며 그 머리털을 깎을 때에 달아 본즉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그만큼 잘생기고 아름다웠음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도
그 아들 압살롬을 사랑했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은혜를 입어 풍족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많은 양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여러 종들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권세있는 왕자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그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배다른 형이 있었는데, 그는 암몬이라는 형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총 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출생순서상 암몬은 다윗의 첫 번째 아들이었고 둘째가 길르압, 셋째가 압살롬이었습니다. 이들은 다 어머니가
다른 배다른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암몬이 압살롬의 친여동생인 다말을 연모하였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가 다르기 때문에 형제들끼리의
결혼은 허용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암몬은 정식으로 다말과 결혼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욕정적으로 다말을 원하였던 것 뿐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옆에는 악한 친구가 있어서 악한 계획을 알려주었습니다. 바로 다말이 병문안을 오게 한다음에 억지로 그를 범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자녀들은 각각 따로 따로 살고 있었는데 그 계획에 따라서 암몬은 병이 들은 척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말이 자신에게 병문안을 하러 오게해달라고 왕께 부탁을 했습니다. 다윗왕은 그 말대로 다말이 암몬에게 가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암몬은 다말을 억지로 끌어들여서 동침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결코 있을 수 없는 악행으로 인해서 다말은 순결을 잃었습니다.
더 악한 것은 암몬은 그렇게 한 다음에 다말을 쫓아내었습니다. 다말은 이렇게 된 이상 나를 받아들여서 아내로 맞이해 달라고 하였지만 암몬은 이전에
연애하던 마음이 미움으로 바뀌어서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쫓아내버린 것입니다.
결국 다말은 스스로 옷을 찢고 재를 머리에 뿌리고 손을 머리에 얹은채로 크게 울면서 떠나갔습니다. 너무나 수치스러웠고 너무나 분노했고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을 친오빠인 압살롬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누이동생인 다말을 위로하면서 그냥 참게 하였습니다.
“삼하13:20 그 오라비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되 네 오라비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저는 네 오라비니 누이야 시방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인하여 근심하지 말라 이에 다말이 그 오라비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그는 암논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왕도 이일을 듣고
크게 분노하였지만 압살롬이 가만히 있고 다말도 가만히 있자 왕도 더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압살롬은 가만히
있고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압살롬에게는 암몬을 죽일 것이라는 자신만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숨은 계획을 이루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가려고 할 때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자랑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회에서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권리’이기 보다는 오히려 ‘의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얻을 수 있다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온전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나 그런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 의미가
있지 그 전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은 무엇을 하지말고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의 성격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답지 않게 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스스로의 모습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합니다. 압살롬이 이 문제로 형인 암몬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과 기준을 가지고 계획을 세웁니다. 그것이 정말 옳은 일이었다면 왜 하나님께 묻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으려고 했다면 틀림없이 응답을 받았을 것입니다. 혹은 정 그 응답을 받기가 어렵다면 응답을 받을 수 있도록 다른 신실한
성도나 교역자를 통해 조언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일을 실행하기 전, 그것을 누군가에게 나누어본다는 것은 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이 예고가 되고 검토가 되고 준비가 됩니다. 그것이 나쁜 일이면 나쁜 일일 수록 더욱 그런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더 좋은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우리의 삶속에 파국을 막으십니다. 성도가 악하게 되면 그로 인해서 또
다른 누군가가 그 피해를 입게 됩니다. 결국 삶속에 더 커다란 슬픔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하는 분명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왕의 자녀였지만 왕의 자녀답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를 분노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천했습니다. 2년후 그는 자기 집에서 잔치를 열고 암논과 및 다른 형제들을 초대한뒤
그 자리에서 암논을 살해하였습니다.
“삼하 13:28 압살롬이 이미 그 사환들에게 분부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를 자세히 보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치라 하거든 저를 죽이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담대히 용맹을 내라 한지라
29 압살롬의 사환들이 그 분부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생각해보면 압살롬에게는 2년간의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왕의 자녀로 살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수와 심판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왕의 마음에서 멀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를 떠나 그술왕 달매에게로 도망갔습니다. 그렇게 도망을 간지 3년이 흘렀을 때 다윗왕은
압살롬에게 대한 분노와 실망을 거두고 그를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9 다윗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다윗왕은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또 다른 아들을 죽인 일로 인하여 더 상처가 되고 더 아픔이 되었지만
오히려 압살롬에게 마음을 열었습니다. 암논의 잘못도 있었고 암논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다윗은 압살롬을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였고, 또 2년 후에는 직접 압살롬을 불러서 그를 다시 받아들였습니다.
“삼하14:33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 말을 고하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저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들은 돌아왔고 아버지는
다시 그를 안았습니다. 그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고 잃어다가 도로 찾은 것과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보였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압살롬은
진정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압살롬이 돌아온 것은 단지 그렇게 보이기 위함일 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진정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였지만 아들은 진정으로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때 사람의 변화되었다는 말에 대해서 실망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진정으로 변화되었다라고 말하고 그렇게 살겠다고 고백합니다. 이전에 악하게 살았을 수록 그의 선하게 변화됨은
무척이나 고무적으로 보입니다. 과거에 깡패였던 사람이, 과거에 살인자였던 사람이, 과거에 한량이었던 사람이, 과거에 부랑자였던 사람이 이제 자신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앞으로 변화된 삶을 살겠다고 말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고 그래서 결심을 공언하고 그래서
이런 저런 일들을 하지만 정말로 변화되었는가 하는 것은 좀더 지켜봐야 합니다. 내가 어느 길로 간다고 했을 때 정말로 그 길을 가는지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길을 하고 있는지를 볼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그 길로 간다고는 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또 다시 받아주십니다. 또 다시 믿어주십니다. 그의 결심이나 실천은 너무나 빈약하고 부족하고 예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 버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시 반복해서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다윗왕도 압살롬을 그렇게 다시 받아주었습니다. 인격이 훌륭하고 성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정말 원하는 것은 아들과 좋은 관계를 갖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압살롬은 그러한 아버지를 배신했습니다. ‘내것이 다 네것이지
않느냐’던 아버지를 보기좋게 조롱거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아버지와 입맞추고 포옹을 하고 이스라엘로 돌아온 뒤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군대를
조직했으며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체하고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체하면서 아버지의 사람들을 자기 사람들로 빼돌렸습니다.
“삼하14:6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그가 왜 이렇게 아버지를 거역하고 아버지의 것을 빼돌리기 시작했을까요? 왜냐하면 그가 정말로 원한 것은 아버지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침내 압살롬은 자신이 다윗왕을 제치고
새로운 왕이 된다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10절입니다.
“삼하14:10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소리를 듣거든 곧 부르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그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가 자신을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빼앗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것이 다 내것이라고 했으니 아버지의 것을 다 갖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저버린 자들이 결국에 이르게 되는 상태가 바로
이러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할 때만이 자신의 뜻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자신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이루는 자신의 뜻은 무엇인가요? 결국 스스로 왕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고 스스로의 인생을 구성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새로운 왕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지
않을 때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에는 스스로 자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러한 시도는 언제나 실패하고 마는 것일까요? 그것이 성공해서
스스로 왕이 되고 하나님을 우습게 만들고 스스로를 높이려는 시도가 왜 성공할 수 없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탄을 닮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할 때 스스로 죄인이 됩니다. 사탄을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손앞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러한
노력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시는 하나님의 권능앞에 무릎꿃게 되고 마침내 그로 인해서 심판받게 됩니다. 그것은 자녀로서가
아니라 그의 원수로서 받는 결과입니다. 그 심판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것으로부터 오게 됩니다.
압살롬도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쫓아오는 다윗의
부하들에게 쫓기다가 결국에는 머리가 나뭇가지에 걸려서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랑하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머리털이었지만 바로 그 머리털
때문에 도망가다가 붙잡히게 되었고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14 요압이 가로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15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이니라”
아버지를 속이고 아버지를 배반하고 아버지에게 반역하여 모반을 꾀하였던 아들 압살롬은 마침내 그렇게
죽었고 모든 반역은 일시에 제압되었습니다. 그의 처음 모습은 아름다움으로 시작했 지만 그의 마지막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하였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마음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이 아들 압살롬은 과연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들들 중에서 큰아들에 해당할까요, 작은 아들에 해당할까요? 작은 아들은 처음에는 근심과 슬픔의
대상이었으나 나중에는 기쁨과 즐거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큰 아들은 처음에는 기쁨과 자랑이었으나 나중에는 근심과 슬픔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압살롬은 바로 큰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화를 내면 집밖으로 뛰쳐나가던 바로 그 아들 큰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다윗은 바로 그러한 어리석은 아들, 지혜롭지 못한 아들 압살롬을 생각하면서 울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다 네것이지 않느냐고 말하였지만
그 말은 소용없었습니다.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배반했고 그렇게 배반한 결과는 아버지를 울게 만들었습니다.
“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아버지 다윗왕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을 위해서 웁니다. 비록 그
아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고 자기 부하들을 죽이던 자였지만 그래도 그를 생각하며 웁니다. 그가 그 때라도 잘못을 뉘우치며 용서를 구한다면 용서해
주리라고 생각했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진심으로 아들을 사랑했지만 아들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진정으로 용서했지만 아들은
용서받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아버지를 울게 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도 떠나갔고, 그
비유의 의미였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주님으로부터 떠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먼저된 자녀였지만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압살롬처럼 하나님을 떠나가는 자녀들에 대해서 슬퍼하십니다. 자신의 재능을 버리고 자신의 달란트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가 아닌 자신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또 하나의 왕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죽어가는 그분의 자녀를 위해서 괴로워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신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결국은 어떨까요? 엎치락 뒷치락 하면서 결국에는 어떻게
될까요? 결국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녀가 될까요, 아니면 결국에는 하나님을 슬프게 만드는 자녀가 될까요?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과정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자가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사탄의 올무에 잡힐 것이고
사탄이 망하는 것처럼 그렇게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를 용서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기를 원하시는 그분의 간절한 소원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은 자들로서 진정한
용서받은 자의 모습으로 살고자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반역하는 자가 아니라 순종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한주를 시작하면서 진정으로 우리가 무엇을 위해 계획하고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가를 생각합시다. 주일 하루를 쉬면서 다시한번 돌아봅시다. 그래서 순간순간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오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며 살아가는
자들이 됩시다. 자꾸만 하나님으로부터 내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