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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희생] 66계16; 12-21 최후의 심판과 그리스도인들의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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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계16; 12-21 최후의 심판과 그리스도인들의 희생_1

 

 2013.9.29.주. 주일오전.

 

*개요:    상담설교, {4복음서신서},  <1적용>, [1영역]-[5은혜]

 

12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16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17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18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20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

21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여러분은 혹시 ‘열린 결말’이라는 말과 ‘닫힌 결말’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 말이 익숙하지 않다면 이렇게 풀어서 설명한다면 좀더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결말이 정해진 경우’와 ‘결말이 정해지지 않은 경우’입니다. 다시 말해서 열린 결말이라는 것은 결말이 정해지지 않은 경우를 의미하고 닫힌 결말이라는 것은 결말이 정해진 경우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드라마를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에 드라마가 많기는 많습니다. 아침 드라마가 있고 오후드라마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드라마가 있습니다. 뿐만 입니까? 월화드라마, 수목드라마, 주말드라마, 등등 수많은 드라마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들은 열린 결말입니까, 닫힌 결말입니까? 결말이 정해져 있습니까, 아니면 결말이 정해져있지 않습니까? 이해가 빠른 분들은 이미 아셨겠지만 닫힌 결말입니다. 어쨌든 극본이 나와야 배우들이 연기를 할 수 있고 배우들이 연기를 해야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방영이 되기 때문에 결말은 다 나와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스포츠경기를 보십시오. 결말을 알 수가 없습니다. 미리 그 결말을 안다면 스포츠 경기의 결과에 대해서 생겨나는 긴장감이나 박진감은 존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말이 어떻게 될 지 모르기 때문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이 존재하고 또한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승리하게 되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게 됩니다. 이런 경우가 바로 열린 결말입니다. 결말은 정해져있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결과가 도출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인생은 열린 결말일까요, 닫힌 결말일까요? 우리 인생이 드라마처럼 결과가 정해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스포츠중계처럼 결과가 정해져있지 않은 삶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관점과 세계만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삶은 열린 결말의 삶입니다. 우리는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 지 모릅니다. 내년이 어떻게 될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항상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손에 땀을 쥐고 살아갑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때로 밤을 새기도 하고 하루 종일 일하기도 하고, 휴식도 없이, 여가도 없이 끊임없는 노력과 노력 속에서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일이 어떻게 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온전히 신적인 관점과 세계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이 세계를 100% 완전한 닫힌 결말로 바라보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서 정해져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행하고 판단할 지 완전히 아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서 전부 결정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세계속에서는 그렇습니다. 왜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다 결정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시간에 매이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1분뒤, 5분뒤, 1시간뒤, 1일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도 동일하게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에 충만하시다는 것은 장소적인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적인 의미도 들어갑니다. 그래서 주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충만하십니다. 또 그 이유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이 그 모든 것을 다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창조는 단지 이 세계의 시작에서만 존재 했었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창조는 과거에 있었고 현재에 있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세상은 완전한 닫힌 결말로 존재합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닫힌 결말을 보여줍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최종적인 끝은 무엇입니까? 바로 최후의 심판입니다. 그 심판의 마지막 장면은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17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18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20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이 세계의 마지막은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바로 이러한 두 극단 사이에 서게 됩니다. 완전하게 닫힌 결말과 완전하게 열린 결말 사이에서 각 사람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우리의 위치가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결말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를 더 주장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면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결말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의 위치에 영향을 줄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당연히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세계가 열린 결말이 아니라 닫힌 결말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된 뜻과 섭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만 그 결정된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계획에 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뜻에 얼마나 우리가 연합하느냐 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의 것을 희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연합해야 할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시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배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아들과 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질입니다.

 

때로 가족은 부모님의 위치와 형편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다니기도 하고 아버지의 실패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또한 아버지의 성공으로 인해 기쁨을 누리기도 합니다. 지난 여름에 저희 가족은 여름휴가를 어디서 보낼 것인가를 놓고 한참을 고민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큰 딸이 기대가 컸고 실망도 컸습니다. 처음에는 제주도에 싸게 숙박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해서 제주도를 갈까 하다가 비행기 값이 너무 많이 들어서 포기했습니다. 그러면 남해안에 가본 적이 없어서 가족여행으로는 처음으로 부산 해운대를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가는 방식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가족끼리 한번도 기차여행을 해본 적이 없어서 기차를 타고 갈까 했습니다. 그러다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포기했습니다. 결국, 제가 5시간 동안 운전을 해서 해운대에 가는 것으로 해서 최종 결정이 났습니다. 우여곡절끝에 해운대를 가기로 하고 목적지를 정하니까, 큰 딸은 여러 번의 낙심을 경험하다가 결국에는 결정을 받아들이고 해운대 맛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딸은 너무 어려서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참여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가족여행은 시작되었을 때, 무조건 따라오는 작은 딸은 작은 딸 대로 재미있게 지냈고 실망과 체념을 반복하던 큰 딸은 큰 딸대로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모두 함께 참여했기 때문에 의미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장면에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들을 대입시켜 봅니다. 하나님은 미래에 대해서 전부 계획을 세워놓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가장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기 위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오래된 성도가 말합니다. ‘하나님, 최후의 심판은 한번에 완전히 초토화 해 주십시오. 한 순간에 잿더미로 만드셔야 주님께 영광이 가지 않겠습니까? 또한 잊지마시고 저희는 그 모든 고난을 전혀 받지 않게 피하게 해주세요.’

또한 믿은지 얼마 안된 성도가 말합니다. ‘하나님, 전 왜 심판이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이 가장 자비를 베푸셔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계속 인내를 해주세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라는 닫힌 결말에 대해서 끊임없이 우리 인간 수준의 이해를 가지고 열린 결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런 저런 요구를 할 때 우리는 점차 하나님의 뜻과는 멀어집니다. 자녀들이 이런 저런 요구를 할 때 부모님과 서로 기분이 안좋게 되는 것처럼, 분명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구원계획을 이루시려고 하시는 것이지만 우리가 그 결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예비하심에 대한 그 진정한 의미는 사라져 갑니다. 심판의 날은 계속 다가오고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괴롭게 만드는 존재일 뿐입니다.

 

지금 이시대에 무엇이 필요하고 정말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준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라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초라해질 지 생각해 보아도 아찔해 집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주님의 계획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희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 자신도 이일을 준비하시면서 엄청난 희생을 감당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희생이 무엇입니까? 최후의 심판이 종료되는 마지막 과정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십시오.

“12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일곱 대접의 재앙이 계시록에 나타나는 마지막 재앙이고 그 재앙이 끝난 다음에 비로소 최후의 심판이 도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전 여섯 번째 대접의 재앙은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 재앙은 재앙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은 귀신의 영이었습니다. 그들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고 전하고 나타내는 것이 전부 악이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온 천하 임금들을 선동하였고 결국 그들이 세상을 더 지배하기 위해, 장악하기 위해, 다스리기 위해 계속해서 모이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 대한 최후의 심판에 가까워질 때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 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위축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축소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욱 기가 죽어가고 하나님의 일들은 점차 약화됩니다. 세상이 더욱 강해질 수록 우리는 약해집니다. 귀신의 영이 커지면 커질 수록 하나님의 영은 움추러듭니다. 이것이 바로 최후의 심판 전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속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될 일들입니다. 이미 서구유럽과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고 앞으로 우리들에게도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세상의 죄악을 참고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악행과 강퍅함을 견디고 견디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의 죄악에 합당한 형벌을 내리시는 것, 그것이 바로 최후의 심판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최후의 심판을 오해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잘못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 세대에 더욱 높아지고 이 세대에 더욱 강해지며 이 세대에 더욱 유명해지게 된다? 심판을 바라보는 이 세대에? 뭔가 잘못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자녀들은 그분처럼 희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장 술담배를 끊고 경건한 생활을 해보십시오. 음란함을 버리고 순결한 생활을 해보십시오. 강퍅함을 버리고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고 은혜로 갚아보십시오. 순식간에 바보가 되어버립니다. 한순간에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존경할 것 없는 선배가 되고 용기와 배짱이 없는 약골이 되어버립니다. 이 세상은 열린 결말 속에 살면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닫힌 결말을 바라보면서 묵묵히 하나님을 따라갑니다. 그 옛날 노아의 홍수 때에 그러하였고, 이제 동일한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번째 심판에서도 역시 시집가고 장가가고 자기 마음에 옳은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그때에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이일을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우리의 행할 바가 너무나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닫힌 결말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상행위를 중단하고 집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고 언제 닥칠 지 모르는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닫힌 결말을 준비하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후서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가장 중요한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또한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우리가 이렇게 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일을 통해 우리는 진정으로 최후의 심판을 준비하는 자들이 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닫힌 결말을 받아들이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셨던 하나님의 새하늘과 새땅이 열리는 때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부르는 자들이 만드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바라보고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바라보고 기뻐할 때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날을 사모할 수 있습니다. 그 날을 사모할 때에 주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쓸 수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지난 여름의 가족여행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대단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갈등의 시작은 큰 딸이 부산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이어폰을 끼고 계속 음악을 듣는 것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중학생이라 한창 음악을 좋아할 때인 것은 알지만 가족여행이니까 함께 이야기라도 하면서 가자는 생각에 이어폰 빼고 얘기하면서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기분이 안좋았습니다. 휴게소에 들렀는데 계속 툴툴 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참고 참다가 부산에 거의 다 왔는데 교통체증에 걸려서 한참 지체하다가 앞차가 갑자기 서는 바람에 급정거를 하게 되었습니다. 급정거를 하면서 짐이 떨어졌는데 그 짐을 좀 치우라고 하니까 큰 딸이 무척 안좋은 말을 했습니다. 기분이 안좋은 상태에서 무심결에 한 말이었겠지요. 그 말때문에 우리 가족의 갈등은 폭발을 했습니다. 가족여행을 중단하자는 말도 나오고 열차를 태워서 집에 보내자는 말도 하고, 다시는 여행에 오지 않겠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일단 꾹 참고 숙소에 다 왔길래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가서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면서 일정동안 우리 모두가 서로 자기가 원하는 것보다는 가족 모두에게 필요한 것을 행하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달라졌습니다. 서로의 요구사항을 내세우지 않고 희생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 유익하고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하나님은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 때문이 아니라 이 세계를 생각하실 때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실 필요가 있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의 희생에 동참하여 그분의 영광에 들어가는가, 아니면 그분으로부터 멀어져 골치덩이가 되는가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그 희생의 길에 함께 동참하면서 그분의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희생은 주님이 만드시는 놀라운 일들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신비한 일하심입니다. 그 은혜를 외면하지 말고 그 뜻으로 나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됨의 유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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