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소한 것에서 큰 깨달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깨닫습니다. 해가 뜨는 것, 해가 지는 것을 보면서 우주의 원리를 깨닫습니다.
곡식이 무르익고 과일이 열매맺는 것을 보면서 이 세계의 질서를 깨닫습니다. 어떤 다른 사람들은 별다른 깨달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일이 다
그런 거지 뭘 그런 것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그러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가장 놀라운 일은 전부 사소한 일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튼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깨달았습니다. 비중의 원리를 발견한 알키메데스는 목욕을 하면서 목욕탕의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비중의 원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발견이 이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듭니다. 이것은 과학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사소한
깨달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놀라운 유익이 되는 귀중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저는 늘 제 뱃살을 보면서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늘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건강검진을 받고 나서 큰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혈압수치가 높게 나오고 꼭 체중조절을 하셔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뱃살이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놀라운 깨달음이지요? 저는 그래서 지금 체중조절 중입니다. 그 깨달음 속에서 저는
건강의 중요성을 다시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삶을 변화시킨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분을 믿으며 살아갈때에 이세상은 깨닫는 것 투성이입니다. 하나님은 영원을 살아가시면서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것 저것을 가르쳐 주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가르침을 깨닫고
그것을 배우려고 한다면 우리는 단지 100년, 80년 60년을 사는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깨달음 속에서 우리는 천년을 살고, 만년을
살고, 억년을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기나긴 역사속에서 나타난 깨달음을 주시려 하십니다. 내 인생에서는 얻을 수 없는 귀중한 것을 하나님은
그분의 오랜 역사속에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 이유가 천년, 만년의 지혜보다도 이 한 순간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르쳐주시는
것을 알지 못하면 그 한 순간도 제대로 살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쳐주시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필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을 때 그의 생명은 급속히 단축됩니다. 오늘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 사람이 나타납니다. 바로 요나입니다.
“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그는 아파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쳐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화가 나서 죽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은 이유는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요나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에게 깨닫게 하시려고 합니다.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주님은 그에게 그의 성냄이 합당치 않음을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는 하나님이 니느웨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요나에게 있어서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앗수르의 수도였는데 그 수도가
멸망하지 않는 것이 요나에게는 너무나 큰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받아야 하는 형벌을 받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그들이 회개를 한 이상 그들에게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회개를
했다고 해도 요나에게는 아무런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요나가 원한 것은 심판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용서를 결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화만 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는지를 설명하려고 하셨지만 요나가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결정의 이유에 대해서 가르쳐 주려고 하셨지만 요나는
배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냥 죽고만 싶어하였습니다. 이로써 그의 생명이 급속도로 단축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통해서, 말씀묵상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실 깨달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워낙 감정에 빠져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의 전달통로가 차단될 때 하나님은 삶을 통해 깨닫게 하십니다. 설교로도, 성경으로도, 기도로도, 아무 것도 은혜가
되지 않을 때 삶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삶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요나에게도 하나님은 삶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6절입니다.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애초에 박넝쿨이 존재하고 그 박넝쿨로 인해서 그늘이 지고 그래서 요나가 기뻐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의 사건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삶에서
하나의 계획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잠깐 왔다가 사라지는 우리들 개개인의 삶에서 이 세상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으시고
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이 세상을 계속 이끄시는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 세상이 진행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애초에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려고 박넝쿨을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삶속에서 무엇인가를 얻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기쁨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하나님 안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바라볼 때 깨닫는 의미입니다.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알아야 합니다.
추석에 많은 사람들이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이러한 선물들을 보면서
저는 이 속에 다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도 선물을 다른 분들에게 주었는데 다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의미는 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감사라는 의미입니다. 더 깊은 관계라는 의미입니다. 연합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가 없을까요? 인간으로서 우리가 선물을 주고 받으며 그 의미를
본능적으로 깨닫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그 안에서 기뻐하며 감사하며 화평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일에 의미가 있음을 알았다면 나쁜 일에도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일에 의미가 있었다면 나쁜 일에 의미가 없을까요?
당연히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요나에게 일어난 안좋은 하나의 일에는 커다란, 그리고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7절입니다.
“7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박넝쿨을 주셔서 기쁘게 하셨던 하나님은 벌레와 뜨거운 동풍과 뜨거운 해를 준비하셔서 그에게 임하게
하셨습니다. 벌레는 박넝쿨을 다 씹어 없애 버렸고, 뜨거운 동풍은 그를 덥게 만들었고, 뜨거운 해는 그를 혼곤하게,
정신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요나가 이렇게 된 것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뜻을 깨닫지 않고자 할 때에 그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시름시름 앓으면서 혹은 씩씩 거리면서 어찌됬건 그는 죽어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살아가고 있는 삶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죽어가는 중일 뿐입니다.
무엇인가를 얻고 기쁜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얼마지나지 않아 무엇인가를 잃고 슬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 모든 얻고 잃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얻는 것, 그냥 잃는 것만 생각해서는 이 세상은 무의미 그 자체일 뿐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진짜 의미인가를 알았을 때 그 때에는 모든 것이 다 의미투성이입니다. 하나 하나가 다 중요하고 소중합니다. 그 진정한 의미를 알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고통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입니다.
한 예로, 얼마전 신문에 ‘낙지살인사건’이라는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남자의 애인이 낙지를 먹고 죽은 것에 대해서 그
남자가 살인을 한 것이냐는 것이 재판의 주요 관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피고인은 대법원에서 무죄로 확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의 내용이 기사화되면서 한동안 화제거리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증거가 없어도 심증이 있는데 어떻게 피고인이 무죄가 될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죄를 물을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결은 오히려 평범한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대법원의 판결로 모든
재판은 끝이 났고 점차 이일은 기억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정말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얻지 못한 채 분통만 터트리다가 끝이 나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도 정말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깨닫게 하시는데 이 사건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삶속에서 그분의 뜻을 깨닫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 중요한 뜻을 깨닫기보다 감정적으로 화만 내기에 바쁩니다. 미워하기에 바쁘고 비판하고 공격하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우리를 용납하시면서 하나님께 대한 그 모든 인간의 분노와
원망과 불평을 들으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려고 하십니다. 그 뜻을 알게 되면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알게 하시려는지를 알면
우리의 모든 괴로움과 고통과 미움과 분노가 사라질 것입니다. 요나에게 말씀하시려고 했던 뜻을 요나가 제발 깨닫기를 원하셨던 그 뜻을 하나님은 이제
직접 말씀해주십니다.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깨닫게 해주려고 하셨던 사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나에게 그렇게 알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몰랐을까요?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알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그 앞서 요나서 4장 2절에 나옵니다.
“욘4: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그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분임을 알았지만 왜 그러시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니 당장 자신이 볼 때 죽어야 하는 니느웨
백성들에 대해서 용서를 베푸시는 것이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 무지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그는 죽고 싶어했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그러시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용서를 베푸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심판을 행하실 때에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멸망시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의 신이셨습니다. 온 우주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니느웨가 회개 했을 때 그들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요나는 그것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자기 수준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수준 이상의 하나님을 알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낼 것이
아니라 그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요나는 자신이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다고 했지만, 그러나
사실 그것은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만드시고 그리고 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을 때에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화내는 것이 합당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1년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10년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100년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천년, 만년, 영원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이말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정말 알게 되면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지고 영생을 사모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어줍니다.
지난 주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은 많은 것을 주시기도 하고 잃어버리게도 하셨습니다. 그속에서 우리는 기뻐하고 슬퍼하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하나님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려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살아가면서 깨닫게 됩니다. 잃어버리면서 깨닫게 됩니다. 얻으면서 깨닫게 됩니다.
점차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며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을 슬퍼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됩니다.
요나가 진정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어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시 ‘낙지살인사건’으로 돌아와서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대법원에서 무죄선고의 이유로 밝힌 ‘증거불충분’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진정한 심판을 위해서는 온전한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애초에 증거가 구체적이었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을 증거가 다 사라진 다음에서 피고인의 죄를 찾으려고 했을 때 너무나 한계가 많았던 것입니다.
혹은 또 다른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요.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은 우리에게 온전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찾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은 유한합니다. 때로 불합리합니다. 때로 매우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전하신 심판자이십니다. 그분의 판단은 명확합니다. 그분의
판단은 완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자리에 계셨고 그 자리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보셨으며 그 모든 가해자와 피해자의 일들로 인해서 마음이
아프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분의 완전하신 심판을 믿고 따릅시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보다 더 완전한 심판을 내리실 수는 없습니다. 그분이 니느웨를
용서하셨다면 그럼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니느웨를 심판하신다면 그렇다면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용서를 막을 수 없고 그분의 심판을 만류할
수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판단이 가장 정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심판 속에는 하나님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분의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모든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희생을 발견합니다. 그분의 심사숙고와 그분의 안타까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깨달음이 바로 우리의 사소해 보이는 삶속에서 시작됩니다. 삶속에서 일어난 하나 하나의 경험과 사건을 들으며 보며 경험하면서 또
한번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 속에서 하나님을 통해 그 뜻을 깨달을 때, 이것은 영생으로 나아가는 또 한번의 깨달음이 될 수 있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또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가는 삶이 저와 여러분에게 온전히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삶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워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