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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계획] 1창42; 6-12 사브낫바네아인가 요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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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창42; 6-12 사브낫바네아인가 요셉인가_1

 

 2013.7.14.주. 주일오전. 주제설교-계획

 

*개요   {1오경역사서} [4욕구]-[5은혜] <4극본>

 

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7    요셉이 보고 형들인줄 아나 모르는체 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8    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

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10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11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로서 독실한 자니 종들은 정탐이 아니니이다

12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여러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이 이름을 이전에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쩌면 눈치채셨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흔히 사용되지는 않기 때문에 익숙하지는 않은 이 이름의 주인공은 ‘요셉’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많은 들은 요셉의 공식적인 이름은 ‘사브낫바네아’였습니다. 바로 애굽에서 총리가 된 다음에 바로에게서 받은 이름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총리가 되었고 그곳에서 바로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받아서 그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온’이라는 도시의 제사장이었던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였습니다. 온이라는 도시는 태양신을 섬기는 곳이었는데 그 태양신의 제사장의 딸과 결혼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브낫바네아’인 요셉은 아내 아스낫을 통해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잘 살았습니다. 아주 평안하게 잘 살았습니다. 이전에 애굽에 노예로 왔다는 것도, 이전에 가나안에서 살았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던 어느 날 그 모든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일단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장면을 보여줍니다.

“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바로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쌀을 사기 위해서 왔던 것입니다. 이미 시기는 일곱 해 풍년이 끝나고 일곱 해 흉년이 시작하여 모든 지역에 가뭄이 찾아온 때가 되었습니다. 2년만에 먹을 양식이 떨어진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에 식량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설마 자신의 동생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자기들이 보고 있는 이 총리는 바로가 어디에선가 데려온 능력있고 지혜로운 ‘사브낫바네아’님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야곱의 아들들, 요셉의 형들은 차마 애굽의 지체높으신 총리님을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일개 식량을 얻기 위해서 온 외국인일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자신을 애굽에 팔은 형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드러나지 않게 감추면서 일부러 더 엄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7    요셉이 보고 형들인줄 아나 모르는체 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아는 척 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은 아무 것도 모른채 두려운 마음으로 애굽의 총리 사브낫바네아 님께 꿇어 엎드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에게 이상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스파이 누명을 씌우는 것이었습니다.

“8    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

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형들은 펄쩍 뛰며 부인했습니다. 자신들은 절대로 정탐이 아니고 틈을 엿보러 온 것이 아니라 곡물을 사기 위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다시 말했습니다.

“12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그러자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려고 안해도 될 이야기까지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은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열두 아들인데 하나는 없어졌고, 또 하나는 너무 어려서 못왔다고 했습니다. 이런 내용은 요셉은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려고 애써 시시콜콜히 다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으면서 요셉은 한 번 더 말했습니다.

“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이니라 하고”

 

여기서 말하는 너희 아우는 ‘베냐민’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바로 그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참고로 베냐민과 요셉은 어머니가 같습니다. 라헬이 낳은 두 명의 아들이 바로 요셉과 베냐민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라헬은 베냐민을 낳고 나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베냐민과 더욱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요셉은 바로 그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형들은 애굽의 총리가 왜 자신들을 의심하며 자기들의 막내를 데리고 오라고 하는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곡물 사러 왔다가 곡물은 사지도 못하고 스파이로 누명을 쓰고 막내마저 데리고 오도록 요구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셉은 이렇게 자신의 형들을 힘들게 하고 있을까요? 왜 그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그들을 스파이로 몰았던 것일까요? 요셉이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요셉의 마음이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알고 싶다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면서 ‘요셉’이 아닌 ‘사브낫바네아’로 살아갑니다. 그 사브낫바네아로서의 삶은 공적인 삶입니다. 그속에서 우리는 사장님이기도 하고 이사님이기도 하며 부장님, 과장님, 팀장님, 혹은 대리님이기도 합니다. 또한 박사님이기도 하고 영감님이기도 하며 선생님 혹은 사모님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세상에서의 이름입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이름을 붙여준 것처럼 세상이 우리에게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 이름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그 안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혹은 그 속에서 묻혀 버리고 싶기도 합니다. 이전에 어떤 이름을 가졌다 하더라도 교회에서 어떤 이름을 가졌다 하더라도 세상에서의 이름이 더 나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 이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싶은 것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영화 중에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극중에는 경찰이었으나 폭력조직의 스파이로 잠입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조직속에서 주인공은 고민합니다. 경찰로 있어야 할 것인가, 조직원으로 있어야 할 것인가. 또한 폭력조직의 우두머리가 학교의 학생으로 옵니다. 그리고 고민합니다. 조직원으로 있어야 할 것인가, 학생으로 있어야 할 것인가.

우리도 비슷한 고민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사람처럼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그것은 교회에 나올까 나오지 말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직업을 가질까 가지지 말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주일이 되면 교회에 옵니다. 당연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직장에 나갑니다. 문제는 바로 그 월요일부터 금요일사이입니다. 그렇게 내가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 교회를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이름의 뜻은 ‘더함’이라는 것입니다. 라헬이 요셉을 낳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더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지은 이름입니다. 반면 바로가 지어준 ‘사브낫바네아’의 뜻은, ‘세상의 구세주, 생명의 부자’라는 뜻입니다. 요셉의 뜻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더 화려하고 더 위대하며 더 멋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요셉이라는 이름보다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을 더 좋아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가진 이 세상에서의 모습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도로서의 모습보다 더 우선시 될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왜 요셉이 오래간만에 만난 형들에게 이렇게 대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갈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애굽의 총리로 살고 싶은 마음이 더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만 불쌍한 동생만 데리고 와서 애굽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형들을 압박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냥 세상사람들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역시 세상에서의 직함과 세상에서의 업적과 세상에서의 호칭이 더 좋게 생각됩니다. 아무리 천국을 바라보기는 하지만 천국을 위해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히려 겸손히 조용하게 ‘사브낫바네아’로 살아가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어쩌면 우리의 솔직한 생각일 것입니다.

 

요셉도 바로 그것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우여곡절끝에 형들이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게 합니다. 그리고 베냐민의 짐에 요셉의 은잔을 넣어둡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은잔을 훔쳐갔으니 그 사람을 노예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44:16 유다가 가로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44:17 요셉이 가로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나의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요셉은 이렇게 베냐민만을 원했고 다른 형제들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원했던 것은 베냐민만 데리고 사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사브낫바네아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적절히 형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었고 조용히 베냐민만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살아계심도 확인하였고 그로 인해서 마음의 위로도 얻었습니다. 이제 원하는 것은 그대로 평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베냐민만 데리고 가고 나머지는 다 그대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27    주의 종 우리 아비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28    하나는 내게서 나간고로 내가 말하기를 정녕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29    너희가 이도 내게서 취하여 가려한즉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30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31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비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사실 우리가 몰랐던 요셉의 큰 마음의 고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 요셉 앞에서 아버지 야곱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 유다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사실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은 사람입니다. 유다가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리자고 제안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다 한사람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싫어졌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유다를 통해 자기를 인해서 고통스러워하였던 아버지 야곱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셨던 아버지가 이제 베냐민을 사랑하시면서 그를 잃으면 죽게 된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와 자기가 이제 하려는 베냐민만 남기려는 일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셉에게는 형 유다때문에 아버지 야곱이 안보였던 것입니다. 자신은 그저 하나밖에 없는 동생 베냐민만 돕고, 베냐민만 챙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자신에 대한 커다란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생명은 아들의 생명과 결탁되었습니다.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기 자신과도 깊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야곱이 사랑했던 요셉과 베냐민은 그냥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자들이 아니라 없어지면 죽게 되는 사랑으로 연결된 자식들이었습니다. 유다 너머로 아버지 야곱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태양은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습니다. 내가 부담스러운 한 사람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이 가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유다의 말을 들으며 피끓는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요셉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이 터질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45: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45:2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자기는 그저 ‘사브낫바네아’로 만족하면서 살아가려고 했는데, 애굽총리로서의 위상과 존경만을 즐기면서 살려고 했는데, 가족들은 내버려 두고 이전의 자신이 요셉이었다는 것은 다 잊고 살고 싶었는데, 아버지의 사랑이 그가 정신을 번쩍 차리게 했습니다. 그대로 애굽인으로 살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브낫바네아’였지만 ‘요셉’이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는 ‘요셉’이었습니다. 엄마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그는 요셉이었고, 지금도 자신은 야곱의 야들 ‘요셉’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눈이 떠졌을 때, 그는 고백했습니다.

“45: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그는 자신이 바로 ‘요셉’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했습니다.

“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그가 갑자기 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사브넷바네아가 된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받아들였습니다. 온 가족들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비로소 이해하고 그것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야곱에게처럼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분명한 한계 너머에 있습니다. 그 계획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피하려는 그 어떤 대상보다도 더 우월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오히려 우리를 위해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어려움과 방해와 역경 속에서도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을 통해서 나타났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사랑을 생각할 수 있을때 ‘사브낫바네아’의 삶 뒤에 숨지 않고 ‘요셉’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브낫바네아’는 그대로 있고 ‘요셉’은 죽어버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요셉’을 살렸습니다. 그리고 ‘사브낫바네아’인 ‘요셉’만 나타났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세상에서의 나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의 직함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직함으로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직함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애굽의 총리로서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가족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요셉이 현직에 있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은퇴 후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요셉은 ‘사브낫바네아’로서 죽지 않고 ‘요셉’으로서 죽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50: 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그는 진정으로 요셉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요셉을 ‘사브낫바네아’로 기억하지 않고 ‘요셉’으로 기억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직장인으로 혹은 세상 사람으로 끝나지 말고, 한 사람의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는 자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뜻을 성취하는 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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