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따라 강남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연스럽게 들었던 속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속담의 유래를 살펴보면 별로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의 강남이라는 말은 중국 양자강 이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강남이란 우리 서울의 강남이 아니고, 아주 멀리 있는 남쪽의 지역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친구를 따라서 가지 않아도 되는 먼 길을 떠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괜히 부화뇌동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이 없이 남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친구따라 강남가는 일은 없으시겠지요?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함께 해서 좋은 경우를 말하는 속담도 있습니다.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등등이 있습니다. 이런 속담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고 해서 늘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살아가는 것이
항상 좋은 것 만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단순히 홀로 있는가, 혹은 함께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이런 속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생선을 가까이 하면 생선냄새가 나고 꽃을 가까이 하면 꽃향기가 난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함께 하려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선과
함께 하면 선해집니다. 반대로 선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악해집니다. 신앙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선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악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교회의
일에 함께 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정말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일까요?
대부분은 그럴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사람이었던 가룟 유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질 될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함께 있기만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늘 성경말씀에 등장하는 에스라는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설명은 오늘
읽은 부분보다 조금 더 앞서 나오고 있습니다. 7장 1절입니다.
“1 이 일 후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저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이후로 쭉 그의 족보에 대해서 나오는데 내용이 길어서 생략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대제사장 아론의 십륙대손으로 학사이자 제사장이었습니다. 또한 바사왕 아닥사스다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불편없이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또한 경제적으로도 높은 위치에서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살아가던
사람이 바로 에스라였던 것입 니다.
그런데 그런 안정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읽은 부분이 나타납니다. 7,8절입니다.
“7 아닥사스다왕 칠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8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칠년 오월이라”
그는 혼자서 예루살렘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들 중 몇몇 사람들이었는데 그들 중에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그리고 느디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느디님 사람들이란 히브리어로 ‘נתין’이라고 하는데
이는 ‘드려진 사람들’이라는 뜻이고 일반적으로 ‘성전봉사자들’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사람들 중의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들이 예루살렘에 온 이유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지고 그 성전을 섬길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제사장들과 그들을 도울 레위사람들과 노래로 섬길 노래하는 자들, 문을 지킬
문지기들, 그리고 여러가지 봉사를 할 성전봉사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이 바사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그 앞장
6장의 한부분을 살펴봅니다.
“스6:14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함으로 인하여 전 건축할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전을 건축하며 필역하되 15 다리오왕 육년 아달월 삼일에 전을 필역하니라”
다리오 왕이 성전건축을 명령하는 조서를 내렸고 다리오왕 6년에
전을 다 완공했습니다. 그리고 아닥사스다왕 7년에 성전에서 섬길 수 있는 자들이 바사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에스라는 바로 거기에 합류하였던
사람입니다.
에스라의 귀국은 간단한 것 같지만, 만약 우리가 그런 상황이라면
쉽게 올 수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에스라의 삶이 앗수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면 그곳에서 정착했을 것이고 안정된 모든 환경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현실속에서 우리는 직장에서의 안정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하나님 일에 대한 관심과 목표를 갖는다는 것은 틀림없이 부담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바로 그러한 어려운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결정은 ‘꽃을 가까이 하면
꽃향기가 난다’는 것에 해당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기준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에스라가 모든 것을
놔두고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을 위한 분명한 하나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10절입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고자 할 때에 그의 길은 자신의 계획을 이루는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을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준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또한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는 일이란 바로 주님은 성전을 지으시고 만드신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성전은 백성이 거만하게 되고 방자하게 되는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성전의 의미는 결국 그 말씀을 연구하여 준행하게 하는 처소이며, 그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진리의
기둥이자 터전이었던 것입니다. 에스라가 이러한 거룩하고도 올바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을 때에 그의 예루살렘으로의 길은 그냥 그 자신의 여행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길이었으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길이었습니다. 에스라가 자신이 바사제국에서 아닥사스다왕 밑에서
총애를 입으며 평생을 살아도 괜찮은 삶이었지만 그러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온 것은 바로 이러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삶속에서 하나님을 따른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서 목표를 갖는 것입니다. 단지 몸만 같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표면적인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마음을 같이 하지 않는, 몸만 함께 하는 그런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일시적이고 형식적인 이러한 관계는 결코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따르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손을 펼치사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9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일반적인 여행기록과의 커다란 차이는 그 여정이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냥 길을 떠난 것이 아니었고 그냥 도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서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단지 여러사람과 함께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 하나님께 대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을 가르치려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 목표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며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선한 손’이라는 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하나님의 선한 손’은 항상 특정 상황에서 등장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느헤미야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선한 손을 보십시오.
“느2: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
하나님의 선한
손은 느헤미야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왕의 허락과 왕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손은 보이지 않는 능력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러한 손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손은 손만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분의 사람들과 함께 하심을 보여줍니다. 이사야51:16을 봅시다.
“이사야 51:16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려 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그 손이 자신의 손이심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 이 모든 일을 이루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단순한
하나님의 영향력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분명 자신이 친히 역사하심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그 손으로 하나님의 세우신
자를 보호하시며 그 자녀들을 이끄시고 자신의 백성으로 나타내시며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 손의 의미에 대해서 에스겔 선지자가
본 것은 가장 구체적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손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겔8:2 내가 보니 불 같은 형상이 있어 그 허리 이하 모양은 불 같고 허리 이상은 광채가 나서 단 쇠 같은데
3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는 투기의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그 손은 에스겔을
들어서 천지사이로 올리셨고, 그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셨으며 주님이 보게 하시는 이상을 볼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손은 하나님을 위해 왕에게 간구할 때 그 간구를 받아들이도록 하시는 손이며, 그 손은
하나님의 일군들이 주님의 일을 위해 보호하시며 세우시는 손이고, 그 손은 하나님의 일들을 위해 인도하시며 이끄시는 손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하나님의 일들을 따르는 자들에게 나타납니다. 그 손길은 하나님의 일이 동참하는 자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모두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뜻에 연합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을 느끼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그런 하나님의
손의 붙드심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지난 번 속초에 갔다 올 일이 있었는데, 국도에서 앞의 차가 황색신호등에서 지나가는
듯 하다가 갑자기 정지해버렸습니다. 순간적인 상황에 저도 당황했지만 다행히 운전대를 옆으로 비틀어서 충돌하지 않고 잘 정지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빙판길에 차가 3~4바퀴를 돌았지만 아무런 충돌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저의 딸이 자전거를
사서 탔을 때 저는 제 손으로 그 자전거의 운전대를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전하게 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그렇게 우리 삶에 임합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하나님의 손길은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때에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힘껏 잡고 계실 때 우리를 놓치 않으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우리가 그분의 손에 꼭 쥐어져 있다는 것은 때로 답답한 생각도
들지만 그 속에서 보호받음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손을 주님 자신의 손으로 꼭 잡아주십니다.
만약 우리가
이 간섭과 강권하심이 싫어서 도망간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고 찾으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동행이 아니라 추적입니다. 하나님과 목표가 같아서 하나님
가는 길로 함께 자발적으로 나아갈 때 그것이 동행입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로 하나님을 끌어당기는 것도 동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억지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복되지, 하나님의 추적을 받는 사람은 스스로는 무척 힘들고 괴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가 되어서 동행하는 자가 되야 합니다.
체육공원에 달리기를
할 때 사람들과는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바퀴를 돌때마나 만나기는 하지만 그 만남은 별로 좋은 만남은
아닙니다. 같은 방향으로 달리지 않아도 만나기는 합니다. 그러나 역시 같은 방향으로 달리지 않는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방향으로
갈 때 만나는 사람과 주님의 반대방향으로 갈 때 만나는 사람이 다르게 느껴지듯이 우리가 주님의 반대방향으로 갈 때 주님을 만나는 것과 주님의 방향으로
갈때 만나는 주님이 전혀 다릅니다.
에스라는 그냥
예루살렘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그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의 도우심을 따라서 온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순종과 연합과 소망을 가질 때 우리는 끌려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손의 은혜를 느끼며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하나님의 손의 손길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그 손길을 느끼며 진정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