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지난 주 우리는 에베소의 어떤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장하는 어른 신앙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그들은 어린이 신앙에 있었으나 바울을 통해서 어른 신앙으로 나아갔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통해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쩍 성장한 신앙인들이 되었습니다.
어린이가 나중에는 어른이 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도
지난주엔 어린이날과 어린이주일을 보냈지만 이번주엔 어버이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꽁트가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시달림을
받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인 아들은 어린이날이니까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이거 사달라 저거 사달라 엄청 조르고 있었습니다. 그말을 잠자코 다 들은 아버지가 씩웃으며 말합니다. “3일 뒤면 어버이 날이다. 색종이 카네이션은
안받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린이가 어른이 되는 이 자연스러운 성장이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어린이 신앙이 어른 신앙이 되기 위해서도 역시 배워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에서의
성장에 대해서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엡1: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부르심의 소망’, ‘그 기업의 영광’,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 이 세가지를 깨닫기를 원했고 우리는 이 세 가지를 깨달을 때에 어린이 신앙에서 어른 신앙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첫 번째인 ‘부르심의 소망’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오늘 말씀은 바로 그 부르심의 소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내가 많은 신 중에서 하나님을
선택했다’정도로 규정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이렇게 규정하십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내가 살려냈도다’ 입장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선택의 대상으로 보고 있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규정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자신의 참담한 상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내셨다는 말은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것입니다.
저의 큰애는 서울 영동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얘가
좀 큰 다음에 너는 영동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 났단다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얘가 친구들에게 가서 ‘나는 영동 세브란스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이게 와전이 되서 ‘쟤는 영국에서 태어났대’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애가 영국이 아닌 그 영동 세브란스에서 태어나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처음엔 개인병원에서 낳으려고 했는데 어느 날 진찰을 마친 선생님이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양수가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영동 세브란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몇주 간절히 기도하면서 조심스럽게 지켜보다가
조금 나아졌다고 해서 다시 개인병원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번엔 태아가 탯줄을 목에 감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더 간절히 기도하면서
주의깊게 기다리다 보니까 결국 그 병원에서 출산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저런 마음의 괴로움과 걱정은 모두 부모의 몫이고 건강히 태어나 준 우리 딸은 아무것도 모른채
그저 자랑스럽게 영동 세브란스에서 자신이 태어났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저 난 모태신앙이다, 난 가족을 따라서 교회에 왔다, 난 친구따라 교회에 왔다, 난 자원해서 교회에 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모태신앙이기 위해서 부모님들은 얼마나 처절한 신앙적인 전투를 벌여야 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나를 전도하기 위해서 우리 가족은 얼마나 인내하고
견뎌야 했는지 모릅니다. 나를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내 친구는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얼마나 상심해야만 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내가 내발로 교회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 교회는 얼마나 고통을 겪여야만 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자랑스럽게 구원받았음을 당당하게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를 내가 살려냈도다’ 그렇게 주님을 잘 믿는 부모님이 있게 하신 분은, 믿는 가족이 있게 하신
분은, 믿는 친구가 있게 하신 분은, 믿을 수 있는 환경이 있게 하신 분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들의 모습 속에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번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주변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방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이 세상에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 있었던 것입니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 영이 지금도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게 합니다. 그리고 더욱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그 영은 바로 사탄입니다. 우리도 예전에는 이 사탄의 권세 속에서 행하였고 따랐으며 그
영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였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요? 3절을 보십시오.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 속에서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습니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이들처럼 본질상 진노의 자녀, 악한 영의 자녀, 사탄의 자녀였던 것입니다. 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행하는 자들 일 수 밖에 없었을까요? 왜 사람들은 그러한 진노의 자녀, 악한 영의 자녀, 사탄의 자녀일
수 밖에 없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1,2년 전의 일이 아닙니다. 10,20년 전의 일도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 옛날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바로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자유의지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는 의지를 가진 인간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택할 수 없는 인간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은 둘 중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사탄이 뱀으로
나타나서(정확히는 용이었습니다)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죄를 짓도록 유혹하였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왜 사탄이 유혹을 하도록
허락하셨는가에 의문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필수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유혹을 이겨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그 유혹을
이기고 선을 택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수개월에 걸쳐 애써 배를 만든 다음에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그 배를 물에 띄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진수식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배를 물속에 넣어야만 비로소 배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그랬습니다.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였고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그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었지만, 최초의
인간은 이 유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할 수 있었으나 하지 않았습니다. 물 위에 띄워진 배는 스스로 수문을 열고 물속에 잠겨버리게 된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떤 피치못할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게 더 좋아보여서 악의 유혹을 받아들여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최초의 인간은 그 다음부터 죄악의 인간이 되었습니다. 더이상 선과 악을 자유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다음부터는 언제나
악에 의해서 지배되고 육체와 욕심대로 따라 살아가는 진노의 자녀, 악한 영의 자녀, 사탄의 자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은 그
배를 버리고 새로 배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 진노의 자녀, 악한 영의 자녀, 사탄의 자녀가 되고 만 그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하나님은 놀라운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4절입니다.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이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그냥 그렇게 죽게 하지 않으시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그들을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 가죽 옷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죄사함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죄지은 아담과 하와를 위한 온전한 은혜였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죽어도 뭐라고
할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비록 몸은 죽으나 영은 살아날 수 있도록 그 죄인된 삶 속에서 하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들
자신이 구원을 받고 그들 이후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바로
그렇게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진노의 자녀, 악한 영의
자녀, 사탄의 자녀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성령의 자녀가 되고 축복의 자녀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오래전 부르셨던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우리가 어떤 구원을 받았는지 기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할 때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큰애의 경우에 처음 양수부족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을 때 제일 걱정했던 것이 기형아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했었습니다. 또한 목에 탯줄을 감고 있다고 했을
때에는 뇌성마비가 걱정되었습니다. 하여튼 모든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의 가장 안좋은 일을 생각하면서, 남들은 여러 명도 잘 낳더니만 우리는 왜
이럴까 좌절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남들도 다 이런 저런 걱정과 괴로움과 슬픔을 견뎌냈던 것이었습니다. 쉽게 아이를 낳아서 편안히
잘 기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밤을 지새우고 다 눈물을 흘리며 다 슬픔을 이겨가며 자녀를 키웠던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자녀로서 자랐던 것이고 그 사랑으로 또 다시 부모가 되어 새로운 자녀를 키우고 있습니다.
부모의 괴로움을 말하기가 한이 없는 것 처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에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애통해 하시며 눈물흘리시며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고
그 부르심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의 괴로움을 아는 자들이기 때문에 동일한 원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다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와 같은 부르심에 놀라운 소망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소망은 단지 구원받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자녀가
태어났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이 소망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 소망은 단지 죄에서
건져내시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까 보았던 그 침몰하던 배가 단지 항해를 잘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하늘을 날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 하나님 나라에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됩니다.
죄악 가운데 침몰하던 인간이 다시 부상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뚝 높여 세워지는
것,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 온전히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우리 자신으로서는 불가능한 세워짐이지만 오직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긍휼하심으로 이런 일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주님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높이심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에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높이심과 세우심이 있음을 깨닫고 그 은혜를 사모하고
바랄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의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 대한 어떤 행위
속에서가 아니고, 하나님과 맺은 관계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관계가 형성되면 그것은 올바른 방향이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계속 퍼지고 퍼집니다.
더 많은 관계가 하나님 안에서 형성되어집니다.
닉 부이치치는 자신의 생애에 3번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부 실행을 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부모님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형성된 부모님과의 관계가 그를 굳건히 붙잡고 있어서 도저히 죽을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관계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났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것입니다.
만약 어떤 한 사람의 자살이 여러 사람의 자살하는데 영향을 미친다면 반대로 한 사람의 극복이
여러 사람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에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관계를 중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그로 인해 깊은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충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충만함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부르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로 이어진 놀라운 관계의 끈입니다. 그리고 그 끈은 다시 나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이어지는 관계의
연속입니다. 결국 그 관계는 다시 하나님께로 연결되면서 최종적으로는 우리 모두를 하나로 잇는 사랑의 연속성입니다. 이 부르심의 소망을 붙드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소망 속에서 날마다 더욱 주님과 관계가 깊어져가는 그분의 자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