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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희생] 42눅22; 31-34 주님이 기도하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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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눅22; 31-34 주님이 기도하신 이유_1

 

 2013.3.24.주. 주일오전, 주제설교-희생

 

*개요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34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들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둔 상태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은 고난주간 끝에 자신에게 닥쳐오는 끔찍한 고통과 시련을 당하시게 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고난에 대해서 주님은 피하시지 않고 오직 극복하실 수 있기 만을 바라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렇게 묵묵히 자신에게 닥쳐올 고난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좀 색다르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만 해도 산더미인데 주님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가장 믿을 만하다고 여겨지는 베드로를 위해서 말입니다.

 

 

1.    예수님은 우리가 실족하지 않도록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이나, 십자가에 달려계실 때에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부활하신 다음에도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항상 다른 사람을 생각하셨습니다. 주님은 고난 받기 전에는 제자들을 생각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하셨습니다. 함께 매달린 강도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구원받게될 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시며 자기 자신만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다. 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시는 대상에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바로 우리들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뭐라고 기도하실까요? 잘되도록 기도하실까요? 승리하고 성공하도록 기도하실까요? 물론 그러실 것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성경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1, 32절입니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다시 천천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시몬을 두번 부르고 있음을 알 수있습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밀가루를 체에 쳐서 걸러내는 것처럼 하려고 제자들을 시험하였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오래 전 하나님의 의인이었던 욥을 시험하였던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을 시험하였습니다. 그 시험 속에서 욥은 고난과 고통을 받아야 했고, 그와 같이 제자들은 사탄의 미혹과 실족케 함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예수님 만이 사탄의 시험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사탄의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시험 속에서 예수님은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사탄의 청구와 시험 속에서 믿음이 떨어질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 믿음이 온전히 붙어 있기를 기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한 종류인 ‘도고’입니다. 도고는 영어로 ‘intercession’이라고 하는데 죄를 짓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베드로를 위해서 도고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시면서 원하셨던 것은 이것입니다. 그 시험에서 돌이킨 후에 다른 형제를 굳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해 주셨고, 그렇게 기도하신 이유는 사탄이 그를 미혹시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며, 그러한 기도를 통해 원하신 것은 돌이켜서 다른 형제들을 굳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기도해 주셨는지가 나타납니다. 또한 왜 기도해 주셨는지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시는 지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실 때에,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해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사탄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에 기도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승리하여 다른 성도들을 돌아보고 도와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2.    베드로는 정말 세번 주님을 부인하였다.

 

그러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으며 아마 우리들은 잘 실감이 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또한 왜 그렇게 예수님이 심각하게 말씀하시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사탄이 우리를 청구한다든지 믿음이 떨어진다든지 하는 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말이 아닐까요?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그는 주님과 함께 감옥에도 갈 준비를 하였고, 죽음에도 이를 준비를 하였다고 자신있게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34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의 말씀은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옥에 가는게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죽는데에 가는것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주님을 부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결국 믿음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이었습니다. 정말로 베드로는 그날 새벽 닭 울기 전에 세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시간으로 다음날 새벽6시가 새로운 날의 시작이기 때문에, 그날 저녁에 예수님이 잡히신 뒤 다음날 새벽에 대제사장의 뜰에 들어갔다가 대제사장의 종들의 질문에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정확히 ‘오늘 닭 울기 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베드로가 세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다음에 닭이 울었습니다. 그토록 자신했었으나 베드로는 정말로 사탄의 시험에 빠졌고 그로 인해서 믿음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제자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자신하지만 지금은 안심하지만 사탄의 체에 걸려서 계속 미혹을 받게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넉넉히 견뎌낼 수 있을까요?

세속적인 불신앙과 자유주의가 신학의 탈의 쓰고 다가올 때에 많은 신앙인들이 흔들립니다. 철학과 심리학이 과학이라는 미명하에 신앙의 기초를 흔들때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비틀거립니다. 그 권위와 근거와 구체적인 논리가 집요하게 신앙을 파고 들때에 그것을 견뎌낼 만한 신앙인은 흔치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장로교 통합교단의 고민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물질주의와 성공주의가 축복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쓰고 교회 안으로 들어올 때에 많은 경건한 신자들이 흔들립니다. 원칙과 정직이라는 기준을 주장할 때에 생기는 많은 불이익들이 타협과 변질이라는 기준을 받아들일 때에 얻게 되는 많은 유익들과 대비되면서 많은 정직한 성도들이 주저앉습니다. 그래서 청빈하게 살고 정직하고 살고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보다는 비겁하고 탐욕스럽고 악하게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어서 결국에는 세상의 악에 물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속한 장로교 합동교단의 고민입니다.

 

주님을 부인하게 되는 때는 바로 그렇게 우리가 정직하지 않고 거짓말하며 탐욕스럽고 자신의 이익만을 주장하게 될 때 그때 바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어느 순간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나면 닭이 웁니다. 주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대에서 사탄의 미혹에 빠져버렸던 것입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누군가는 논문을 표절하고, 누군가는 공금을 횡령하고, 누군가는 간음을 저지르고, 누군가는 공문서를 위조하고, 누군가는 진위를 바꿔치기 하고, 누군가는 악인을 의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하지않고 잘못을 괜찮다고 말해버립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다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3.    베드로는 정말 세번 주님을 고백하였다.

 

이제 우리가 정말로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 자들이 맞기 때문에 주님이 왜 우리들을 위해 기도해주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믿기 전에도 그러했고, 믿고난 다음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다닌다는 것이 우리의 양심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교회 직분을 맡았다는 것이 우리의 정직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교회 일군이라는 것도 역시 아무런 보증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주님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사탄의 시험에 들었어도 믿음을 버리지 않을 수 있도록,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기도는 정말 효과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 기도는 놀랍게 효과를 나타냅니다. 그 기도는 우리가 돌이켜서 형제를 돕게 만드는 의미가 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 기도를 받는 우리 모두는 그러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번 주님을 부인했던 자가 세번 주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 기도는 도대체 어떤 효과가 있길래 세번 주님을 부인했던 자가 세번 주님을 고백하게 만들까요? 그 기도의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네가 나를 믿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비록 예수님을 세번 부인했지만, 그래서 나는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지만, 주님은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렇게 물어봐 주셨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시인했느냐’라고 물으셨다면 결코 베드로는 그렇다고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렇게 묻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만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나를 믿는 것’으로 ‘나를 시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죄인을 주님은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의인이 될 때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인된 모습 그대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죄인이 나를 사랑할 때 그 죄인을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의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신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베드로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게 해주옵소서. 비록 그가 나를 부인할 지라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놓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신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부인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을 받고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회유와 설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나같은 죄인을 사랑해 주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말로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서서 나는 너무나 악하지만 나같은 자도 사랑해 주시니 너희들도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돌이킨 후에 그 형제를 굳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기도를 통해 문제의 핵심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탄은 모든 불의와 악독과 죄악을 통해서 결국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사탄이 원하는 바였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더욱 죄인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쉬웠습니다. 원래 죄인이 더 죄인되는 것은 너무나 쉽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열가지 악을 행하던 사람이 이제 열한가지 악을 저지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그속에서 자포자기 하여 하나님을 버리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사탄이 원하던 바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의로운 행위를 하게 만드시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려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그런 죄인을 계속 사랑하십니다. 그렇게 사랑을 받는 죄인이 변화되어서 그 다음에는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의인되는 삶입니다. 행동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가 바로 주님이 원하셨던 일입니다. 그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주님은 죄인을 위해 기도하셨고 그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아 베드로가,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더 나아가 성화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세번, 네번, 다섯번, 계속해서 주님을 시인하며 사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자.

 

이제 우리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고난받으시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주님이 고난 받으시는 것은 과거의 죄때문만이 아닙니다. 현재의 죄때문입니다. 또한 미래의 죄때문입니다.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우리의 죄때문에 주님은 고난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를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또 우리 자신이 지금 주님을 부인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망각해 버릴 것입니다. 더불어 그러한 자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고난주간에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죄를 위해 기도하시는, 우리의 앞으로 지을 죄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우리의 죄가 하늘을 찌르더라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죄가운데서도 떨어지지 않고 돌이킬 수 있고 다시 주님의 사랑가운데 또다시 다른 성도들을 붙들어 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베드로전서를 쓰면서 이때의 감격을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벧전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 자신도 사탄의 밀까부르듯 하려고 청구하는 시험을 당하면서 괴로워하였지만 결국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그 영광을 보면서 감사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기도하신 이유를 기억하면서 시험중에라도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사랑을 사모합시다. 그럴 때 주님은 반드시 그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고, 우리를 붙드실 것이며,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얼마나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자인가를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번 고난 주간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의지하며 붙들어서 우리 자신이 더욱 새롭게 변화되는 시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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