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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절제] 42눅 23;33-43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우리의 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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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3;33-43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우리의 절제_1

 

 2014.9.28..주일오전.

 

*개요:    73절제, 4극본, 5복음서, 5은혜-7실천

23: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23: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23: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23: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제 9월 마지막 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추석으로 시작되어서 휴식이나 혹은 많은 가족행사의 의미가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9월은 특히나 더 빨리 지나간 것 같습니다. 그속에서도 우리가 하려고 했던 것을 잊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달에 우리가 생각하고 애쓰려고 했던 주제는 절제였습니다. 절제는 헬라어로γκράτεια (egkrateia)라고 하고 이를 영어로 하면 ‘self-control’ 혹은 ‘temperance’라고 합니다. 이 말을 형용사로 쓰면 ‘temperate’이고 이는 절제된, 온화한, 차분한 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의미는 절제는 일차적으로 행동의 통제를 의미하지만 더 나아가면 성품의 변화로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제란 단순히 내가 나쁘게 하는 어떤 일의 자제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어떤 행동이든 과잉하지 않고 과도하지 않고 지나치지 않는 온화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절제는 말에 있어서도 적용될 수 있지만 또한 우리의 삶의 행동, 모습, 태도 등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절제의 열매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이러한 절제가 필요할 까요? 그것은 그렇지 않을 때에 우리의 모습은 무절제의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무절제한 모든 모습으로 인해서 생겨난 일들은 바로 입니다. 우리가 적절히 통제하고 관리하고 조절했다면 좋았을 많은 일들이 무절제하고 남용하고 과잉될 때에 결국은 죄의 고통스러운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부부간에 연인간에 한참 사이가 좋다가도 욕심을 내고 과도하게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다보면 큰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됩니다. 가족간에 화목하게 보내다가도 좀더 자신의 뜻을 더 요구하고 추구할 때 결국에는 감정이 안좋아지게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열심히 신앙생활 해보려고 해도 교회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욕심을 내다가 결국에는 실족하고 범죄하고 맙니다. 이 같은 일은 우리가 있는 이 사회 속에서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1994 5, 한국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던 부모살해사건이 있었습니다. 새벽에 부부가 남편은 안방에서 부인은 부엌에서 칼에 찔려 죽었는데 그 범인이 알고보니 그집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안방에서 칼로 찔러 죽이고 놀라서 도망가려는 어머니를 부엌에서 살해한 이 희대의 끔찍한 살인사건은 그 아들의 이름을 따라서 박한상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정신병을 앓아서 이기적이고 무계획적이며 공부에 흥미가 없고 불성실했던 이 아들은 성인이 된 후에는 도박과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는 불성실한 삶을 살다가 부모의 100억대 재산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하는 범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부모님은 그를 고치기 위해서 병원에 다니고 학교를 옮겨주고 원하는 미국유학도 보내주었지만 결국 그 자유로운 두 손과 두 발로 새벽에 집에 들어와 부모님을 죽이는 극악무도한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비극적인 사실은 그들이 모두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모든 슬픔과 괴로움과 죄악들이 바로 인간의 죄때문에 생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죄값을 지고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에 달리심은 바로 우리의 죄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그 두 손과 두 발이 모두 대못에 박혀서 십자가에 매달리셔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서 예수님이 치루신 댓가는 그냥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속에서 처절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것이었습니다.

23: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그렇게 가운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두 사람의 행악자도 함께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지만 바로 우리 죄때문에 그렇게 형벌받으신 것이었지만 함께 있던 두 죄수들은 온전히 자기 죄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구원받는 인간들의 죄를 지시고 죽으시는 구세주와 오직 자기 죄로 인해서 형벌받아서 죽는 죄인이 함께 동일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차이는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저 똑같이 동일하게 죽는 것뿐이지 인간의 죽음에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 죽는 모든 인간의 죽음 속에서 다 자신이 죽는 것에 대한 회한과 슬픔과 괴로움만이 있을 뿐이지 그 죽음에 어떤 다른 의미가 있을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은 달랐습니다. 그 어떤 인간의 죽으심과도 달랐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고귀하신 분이 이 세상의 죄많은 인간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 죄는 전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면서 생긴 일들이었습니다. 그 죄인들은 날때부터 죄인이었고 살아있으면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자원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그들을 대신하여 형벌 받으셨습니다. 그 형벌은 죄인 각 사람이 져야만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다 인계하여 받으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자기가 그런 죄를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주님은 형벌받으셨습니다. 각 사람이 져야 하는 모든 죄를 온전히 자기 자신이 다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온몸에 채찍질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자신이 메고 온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이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히는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이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그 형벌과정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백주 대낮에 모든 사람들 앞에서 펼쳐졌습니다. 그속에서 주님은 진정한 구세주이셨습니다. 주님이 그 모든 형벌을 받으시는 것은 바로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 중에서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대신 형벌받는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악한 자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지만 저희는 예수님의 옷을 가지기 위해서 제비뽑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진 고통과 괴로움에 헐떡이며 가뿐 숨을 몰아쉬고 계셨지만 저희는 구경하며 비웃었습니다.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23: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23: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이 모든 과정이 예수님을 죽이는 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원하는 일을 온전히 성취하는 만족스러운 형벌이었지만 주님에게는 그 모든 과정은 바로 그 죄인들을 위한 대신 형벌 받으시는 구원의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죽으시고 계시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바로 그 앞에서 스스로를 구원하고 하면서 조롱하며 비웃고 예수님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왜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왜 끝끝내 예수님이 죽으시는 순간에도 그렇게 예수님을 부인하며 거부하며 멸시하며 조롱했을까요? 예수님은 바로 그들을 위해서 대신해서 형벌을 받고 계셨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사해주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미련한 사람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구경하며 조롱하는 자들은 바로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애쓰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유익만을 생각하며 악을 저지르면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행하는 우리가 바로 그 어리석은 아들입니다.

 

아까 그 패륜 아들은 왜 그런 악한 짓을 했겠습니까? 부모가 시키는 일은 끔찍한 굴레이자 얽매이는 것이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은 자유롭고 쾌락적이며 즐기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뜻을 어기고 결국 부모를 죽여 유산을 차지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그런 일을 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뜻대로 산다면 자신들의 자유로움과 활달함과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권위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모든 순종과 매임과 따라감 대신에 인도자인 예수님을 죽여서 자유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우리도 이와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모든 self-controltemperance와 온유함과 차분함과 절제함을 우리가 따르지 않으려고 할 때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외면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능욕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죽이는 것이 됩니다. 정확히 그일을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그 편에 서게 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께 끊임없는 자유를 요구합니다. 이미 그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악됨을 깨달으면서도 더 큰 자유와 더 큰 즐거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있던 한 강도도 그것을 원했습니다.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그는 그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비방했습니다.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원한 것입니까? 이 상황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무엇을 하기를 원했던 것인가요? 이미 행한 악에도 성이 차지 않아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서 더 죄를 지으며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이고 한 사람이라도 더 고통스럽게 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괴롭히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가 그 변화되지 않은 상태로 다시 사회에 나가기만 하면 그것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입니까?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불구하고 자신의 죄에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생각속에서 그는 여전히 움직이는 흉기입니다. 아무런 제지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악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미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라갈 때에 우리는 그분 편에 서게 됩니다. 주님 앞에서 구경하는 자가 아니라 함께 우리도 그속에서 우리의 악함과 우리의 강팍함을 깨닫고 우리가 우리의 손을 십자가에 부착하고 우리의 발로 십자가를 딛고 설 때에 그 때에 비로소 그 죽으심을 온전히 따르는 자들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죄성과 우리의 한계를 인식하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따르고 주님 편에 서고 주님의 구원하여주심을 감사하는 자가 될 때 우리는 기꺼이 우리의 매임과 우리의 고통당함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그런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어머니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아들로서, 딸로서, 형으로서, 언니로서, 동생으로서, 친척으로서, 이웃으로서, 친구로서, 아는 사람으로서의 매임이 있습니다. 그속에서 우리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좀더 유익을 누리는 삶을 위해서, 좀더 쾌락적인 삶을 위해서, 좀더 편안한 삶을 위해서 다시는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서도 안되는 인생길을 자꾸만 뒤돌아가려고 한다면 그 자체가 우리에게 더 큰 악을 저지르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좀더 좋은 삶을 살았더라면, 좀더 좋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좀더 좋은 일을 했었더라면 하는 모든 후회는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절제되지 못하고 책임지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고 온화하지 못한 삶을 살게 합니까? 인생의 종착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 목적지를 바라보면서 뒤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갈 생각만 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그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기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모든 대신 형벌 당하심을 생각할 때 우리가 원하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나라에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만 기억되고 주님만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해 주십니다.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토록 십자가에서의 자유로움을 부르짖었던 행악자에게는 아무 말씀이 없었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나라에 함께 있기를 고대하고 부탁했던 그 다른 편 죄인에게는 낙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도 바로 그 나라에 가고 계셨기 때문에 그 나라를 소망하는 죄인을 주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거두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이루시며 사모하셨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유와 행복을 추구했던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나라를 사모하고 온몸을 바치셨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 편에 서는 자들로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며 우리의 행동을 절제하며 우리의 자유로움이 아닌 신앙의 얽매임 속에서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속에서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다 모이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실패자가 아니라 진정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인생속에서 절제의 열매를 이루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얽매임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그 영광을 이루며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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