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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동행] 42눅 2; 25-35 성화계획으로의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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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눅 2; 25-35 성화계획으로의 동행_1

 

 2013.12.29.주.주일오전.

 

*개요:    56동행, 4복음서신서, 7실천-8사역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뒤로 어떠한 삶을 사셨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성탄절 이후의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성탄의 기쁨을 맞이한 이후에 교회로 들어가셨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이 직접 들어간 것은 아니고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모시고 성전에 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성탄 이후의 삶은 교회로 나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세상에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성전에 간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마음에 소유한 자로서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에, 혹은 예수님을 의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또는 예수님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도 역시 우리는 교회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만 우리가 가진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만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귀중함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의지하였다 하더라도, 아무리 진실하고 신실하게 예수님을 붙들고 바라본다 하더라도 그것에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그 가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그 예수님에 대한 마음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 불씨는 오래 타오르지 못합니다. 주변에서 그런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고 하고 당장 낙심이 됩니다. 그건 이단적이라고 하고 사탄적이라고 하거나 또는 비이성적이라고 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도 하면 예수님께 대한 마음을 계속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실함이나 진실함이 올바르게 평가받지 않을 때 자기 스스로도 더이상 그런 올바름을 지탱해나가기가 불가능해집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실족한 경험이 있고  다른 성도들의 그러한 어려움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 예수님을 낳아서 키우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가 성전에 들어가서 시므온을 만난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진정한 가치와 본질에 대해서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보자마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준다고 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어떤 약속에 붙들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증언합니다. 이 아기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라고,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외쳤습니다. 물론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은 정말 예비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이방을 비추는 빛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예수님을 키우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의미를 전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예수님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 절에 나오는 요셉과 마리아의 반응을 보십시오.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그들은 비록 목자들의 찬송을 들었고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보았지만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에 기이히 여기며 놀라워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시므온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있는 예수님의 가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시므온은 어떻게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었던 아기 예수님을 바로 그 시간에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으며 또한 예수님의 가치를 어떻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 까요? 그는 사실 오래 전부터 메시야를 보기로 약속되어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와 하나님 사이의 약속이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하나님은 그에게 미리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지시였고 그 지시속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꼭 봐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오래전 약속이었기 때문에 아기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이제는 말씀하시는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라고 찬양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기뻐한 이유는 이제 죽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약속하신 대로 정말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제시간에 정확한 장소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도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마음에 알게된 대로 행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시므온 나름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약속과 그 성취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시므온과의 만남속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자신들이 키우는 예수님의 의미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요셉과 마리아가 자신들이 키우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어디에서 일어났는지를 기억해 보십시오. 바로 성전에서 하나님께 정결규례를 행하고자 나아왔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처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교회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시므온과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말을 통해서 진정으로 자신이 알게된 예수님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그 예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시므온과 같이 복음에 붙들려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도하심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리더나 직분자나 사역자나 목회자나 다 주님의 약속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자신들의 믿음의 가치에 대해서 듣게 되고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귀중함과 주님을 믿는 믿음의 고귀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일은 바로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시므온이 되어서 그리고 여러분이 요셉과 마리아가 되어서 여러분의 믿음에 대해서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비록 교회는 다니지만 신앙생활을 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용히 교회에 가서 예배는 드리지만 실제로 예배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서 정말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못듣는다는 현실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속에서 듣는 이야기는 여러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공통적인 뜻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때문에 예배만을 드릴 때에는 정확히 나만을 위한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에 관한 이야기는 들을 수가 없습니다. 내 잘못에 대해서 내 문제에 대해서 나의 목표에 대해서 나의 꿈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찾아내야 합니다. 좀더 정확한 것은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목회자가 되기로 소망한다고 해보십시오. 또는 선교사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해보십시오. 또는 이모 저모로 헌신하기로 마음에 결심했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 꿈과 비전은 최소한 교회 사람들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는 마음의 소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하다보면 그일에 대해서 격려를 받고 그일에 대해서 조언을 듣고 그일에 대해서 기도를 받으면서 마침내 그 소망을 이루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필요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람들을 통해서 허락해 주십니다. 구체적인 진로와 준비계획을 세워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일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기쁨이 됩니다.

반대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해보십시오. 그 문제 속에서 조용히 신앙생활을 접고자 하는 낙심이 생겼다고 해보십시오. 하지만 그것이 고민이 되어서 정작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고민한다고 해보십시오. 그럴 때 교회 안에 있을 때 함께 나눌 성도가 있을 때 중요한 조언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격려와 위로 속에서 그 고비를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돌이켜 볼 때 그때 그 고비를 넘긴 것이 너무나 귀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청년부 시절에 다니던 교회에서 목사님과 장로님이 반목이 생겨서 서로 비난하고 싸우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장로님은 같은 뜻을 품는 성도들을 규합해서 목사님에게 대해서 대응을 했고 목사님은 그런 모습에 대해서 꾹 참으면서 대응을 했습니다. 안타까운 시간 동안에 저는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견딜 수 있도록 붙들어준 것은 같은 청년부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여지는 모습에 실망을 해서 교회를 떠나버렸지만 저에게는 선배와 동기와 후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며 간구하며 견딜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 사건은 장로님측이 뜻을 같이 하는 성도들을 데리고 나가서 개척을 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그렇게 해서 교회를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교회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께 말해준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에게 말해주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아기 예수님은 시므온의 영광의 고백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분 자신으로 영광스러우시고 귀하셨습니다. 문제는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그들이 시므온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그들 자신의 삶을 좌우했습니다. 시므온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준 것입니다. ‘당신들이 키우는 이 아기는 이 온세계를 비추는 빛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실 것입니다!’

만약에 누군가 여러분의 믿음에 대해서 ‘당신의 믿음은 이 온세계를 비추는 빛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우리 민족의 영광스러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해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에이, 제 믿음은 그정도는 아니에요. 저는 모든 면에서 부족한 걸요.’ ‘아유, 너무 심하게 비행기 태우시네요. 그런 일은 없을거에요’ 이렇게 부인하거나 간과해버리지 않겠습니까? 혹은 ‘우와, 제 믿음이 그정도에요? 대단한데. 이 믿음을 통해서 내가 엄청나게 부자가 되겠네. 그럼 나중에 얼마나 편하게 살게 될까’ 라면서 과잉반응을 보일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는 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에 대해서 교회에서 듣는 이야기를 통해 이런 저런 반응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이 어떤 의미인가를 듣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관심과 초점이 아니라면,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관심과 초점을 변질 되어 버린다면 우리는 여전히 진정한 핵심에서 비켜나가게 됩니다.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설교가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설교내용이 단순한 것과 단순하지 않은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설교가 단순해져 버리면 우리는 그냥 자신이 믿고 있는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자체가 큰 변화가 없습니다. 아주 단순해져 버리기 때문에 심지어는 믿거나 안믿거나 별반 차이가 없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잘 이해만 한다면 신앙에서의 놀라운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제가 교회에 올 때마다 이 동네에서 교회 가는 분들을 종종 마주치게 되는데 우리가 한 순서가 끝나서 나오다보면 그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큰 교회 오전 예배만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상황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게 왔다 갔다만 하게되면 그 신앙이 삶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이 차서 삶으로 변화되기까지의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와 같이 신앙자체가 단순하면 그 사람의 욕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 마음 속으로 파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이해만으로는 왜 우리가 내 뜻대로 살지 말고 주뜻대로 살아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을 알아야 하고 성경 속에서 그 의미가 충분히 마음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모이는 사람들은 많지만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그곳은 믿음의 군사들이 아니라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그로 인해서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며 이기적인 삶을 사는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이 신앙생활의 단순화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졸지말고 깨어 주님을 봐야 합니다.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어리석음을 극복하면서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어지는 시므온의 말에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34절입니다.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부모가 예수님에 대한 시므온의 말에 대해서 기이히 여길 때에 시므온은 그들에게 축복하면서 특별히 모친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이 아들이 겪을 고충과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이 아들은 세움을 입었습니다. 또한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습니다. 결코 이방의 빛이 되고 이스라엘의 영광이 된 것은 좋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흥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패하는 사람이 있게 되고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시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칼이 마음을 찌르는 것같은 어려움이 있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요셉에게는 말하지 않고 따로 마리아에게만 한 것은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목격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럴 때 그 모든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시므온이 해준 이야기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모든 일은 바로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처음에는 예수님께 더 배우려고 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지만 나중에는 앞장서서 예수님을 못박았던 관료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좋아하는 듯 했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바로 그 백성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의 빛이 되는 일은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기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대교회를 더 선호하고 소교회에 나아가지 않으려는지 이유가 있습니다. 왜 예배만 드리고 얼른 돌아가려고 하는지 그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여러가지 문제를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칼이 마음을 찌르는 것처럼 아픔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교제의 과정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 괴로운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의 마음의 생각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인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올바르게 고백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에게서 고백되어지는 예수님이 진정한 이방의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시는 것입니다. 성도간의 교제라는 힘든 괴로움을 통해 마침내 나타나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로 우리를 보내시고 그 교회속에서 우리를 성숙시키려는 하나님의 성화계획입니다. 애초에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게 하시고, 30일 후에 정결규례를 행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좋은 이야기든 나쁜 이야기든 듣게 하십니다. 좋은 이야기는 듣고 성장하게 하십니다. 나쁜 이야기는 듣고 구별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한사람의 성도로 성화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해를 마치면서 다가오는 새해에 더욱 이러한 성화계획에 동행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모두는 교회만 왔다갔다 하는 자들이 아니라 교회속에서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고 그속에서 비록 칼이 마음을 찌르는 듯 하더라도 그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우리속에 있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이방의 빛으로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온전히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러한 동행이 앞으로의 우리의 삶 동안에 계속해서 펼쳐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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