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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동행] 40마 2; 1-3 경배계획에로의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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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마 2; 1-3 경배계획에로의 동행_1

 

 2013.12.8.주.주일오전.

 

*개요:    56동행, 3분석, 5은혜->6결심

 

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남들보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7,8시에 하루를 시작할 때 그 사람들은 5,6시에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춥고 어둡고 한적한 시간에 그렇게 힘들게 나와서 하기를 간절히 바랬던 그 일을 이룹니다.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큰 희생과 인내를 가지고 행했다는 점에서 그 일은 가치있고 보람있는 일일 것입니다. 새벽부터 놀러 다닐 수 있겠습니까? 새벽에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대개 생산적이고 건전하며 목표지향적인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일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들보다 한달을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절상품을 준비하거나 다가오는 다음 시즌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멀리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런 식으로 남들보다 1년을 일찍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국가시험을 준비한다든지 예산계획을 준비한다든지 혹은 회사의 미래프로젝트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미리 미리 준비하는 사람들은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주도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생산적인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다 일이 닥쳐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이 다가오기 전에 움직이는 사람들은 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자들입니다.

 

하루를, 한달을, 일년을 준비하는 데서 더 나아가서 영적인 부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음 이후를 준비한다든지, 영원을 준비한다든지, 인간의 육적인 부분이 아닌 영적인 부분을 준비한다는 것도 역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입니다. 또한 그것은 시간의 차이를 초월하여 삶의 의미를 다르게 만드는 일입니다. 보이는 대로 사는 삶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의식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는 완전히 의미와 가치가 달라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갈 때에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동방박사들이 바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나타나게 될 그 왕을 찾아 나섰던 자들입니다.

“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그들이 보았던 별이 의미하였던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은 지금 당장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타나실 분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냥 아기일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30년은 더 지나야 그분이 자라서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핏덩어리에 불과한데, 그리고 그래서 더욱 무시할 수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아기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먼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왕에게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보이는 것만을 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것도 보는 사람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을 보는 사람은 그때 그때 반응할 뿐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도 보는 사람은 모든 일에 준비하고 예비합니다. 즉각 즉각 반응하지 않고 생각하며 판단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 만큼 그는 성장한 것입니다.

예전에 둘째가 아기였을 때 이런 재미있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눈앞에 뭔가 좋아하는 것을 보여주면 깔깔 거리고 웃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사라지면 다시 시무룩해집니다. 다시 그 좋아하는 것을 보면 다시 깔깔 거리고 웃습니다. 저희 딸이 좋아했던 것은 ‘팬더 그림’이었습니다. 팬더 그림만 보면 그렇게 깔깔 거리고 웃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천진난만하고 예쁘고 귀여워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얘가 좀 크니까 그렇게 했을 때 그 그림이 사라진 쪽을 찾았습니다. 그 다음에 더 크니까 그 다음에 장난치지 말라고 합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렇게 무엇인가에 의해 감정상태가 조절됩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애기처럼 그 무엇인가만 보면 입이 귀에 걸립니다. 남자들은 좋아하는 자동차, 컴퓨터, 게임아이템, 혹은 장난감 류를 보면서 기뻐합니다. 여자들은 구두, 가방, 옷, 모피코트, 반지, 보석 등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광고물을 보셨습니까? 일단의 남성과 여성들이 한 이사한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여성들이 옷과 구두, 가방으로 가득찬 방에서 환호성을 울렸는데 저쪽 방에서는 남성들이 환호성을 울린 것입니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건 여러분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는 것에만 몰두하던 사람들도 점차 나중에는 그속에서 허무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비로소 보이지 않는 것을 찾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한 인간으로서 보이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아갈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이 세계의 물질적인 것, 세속적인 것, 환락적인 것에서 벗어나 정신적이고 초월적이며 고귀한 그 무엇을 추구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이 세상 모든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곳은 인간들로 넘쳐나는 세상 한복판이 아니라, 하나님 한분이 중심이 되시는 거룩한 곳에서 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비로소 온전하게 보이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지구 어디에서나 태양을 볼 수 있지만 그 태양의 진가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곳은 바닷가 일출광경에서 인 것처럼 말입니다. 오직 태양만 보고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바로 그 바닷가에서 온전하게 태양을 보게 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가장 거룩한 곳에서 가장 경건한 곳에서 가장 고귀한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개가 묵상하는 것 보셨습니까? 고양이가 기도하는 것 보셨습니까? 동물이 영적인 부분을 추구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오직 인간만이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그 능력을 인간에게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성장하고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보여지는 것에만 집착한다면 그는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자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에서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 바로 그분에게로 나아가고자 할 때에 그는 성장하고 발전한 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수준의 교통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관계입니다. 예를 들면, 은혜의 바다가 있다고 한다면 해변에서 놀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깊은 바다로 배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깊은 바다 위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유대인으로 오신 왕께 경배를 드린다고 하였을 때에 그것은 놀라운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이방인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성경을 잘 알지도 못하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그들은 유대인의 왕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사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를 경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럴 의무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분께 경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원래 별을 보는 동방박사들이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자들이었는데, 그들의 입장으로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놀라운 빛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광의 빛을 보고서 절로 머리가 숙여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동방박사들의 고귀함과 신실함이 커지면 커질수록, 헤롯왕과 모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어리석음과 미련함도 더욱 커집니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 오심을 별을 보고서 미리 알고 그분께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왔건만, 헤롯왕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3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그들은 그냥 허둥지둥 대며 소동을 일으킬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혀 유대인의 왕을 사모하지도 않았고 기다리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유대인의 왕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정말로 자신들에게 메시야가 올 것이며 그 메시야를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질 것임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면 예수님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 그래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의무이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또한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들로서 마땅히 받은 명령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왕됨과 자신들의 권력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유대인의 왕이 났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오히려 더욱 당황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왕이기 때문에 새로운 왕이 나타나서는 안되는데 새로운 왕이 나타났다고 하니 그들은 그렇다면 우리가 더이상 왕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 하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새로운 왕을 인정하고 그분께 경배드리기는 커녕 어떻게 해서든지 그 왕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헤롯왕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들이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경배하러 가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 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왕을 오히려 죽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왕의 무리가 진정으로 왕을 경배하려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동방박사들은 그 왕으로 나신 분을 찾기 위해서 큰 도움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들도 단지 성경 속에서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는 말씀만 찾았을 뿐이지 베들렘헴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나시는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정말로 왕을 경배하려는 자들이 아닐 때 정확한 장소는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저 모호하게만 알려질 뿐이었고 그 다음에는 정말로 왕에게 경배를 드리고 그 왕을 섬기려고 하는 자들만이 온전한 장소를 알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어디에 속한 자들이었을까요? 그들은 정말로 왕께 경배를 드리고자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단지 베들레헴에 계시다는 말만 듣고도 그들은 그곳으로 출발했습니다. 그것은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 격이었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만나리라는 일념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벽부터 새벽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루 종일 기도원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요, 금요예배를 통해서, 또는 주일오전, 오후예배를 통해서 만나려고 하고, 또는 성경을 읽으며, 신앙서적을 읽으며, 개인적인 기도시간을 가지며, 끊임없는 묵상과 수행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도 합니다. 그 모든 노력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나를 만나려고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할까요? 그것이 자기의 무엇 때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6: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하나님은 사람들이 단지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떡을 위해서 나아가는지 아니면 표적을 보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러 가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면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무의미해집니다. 우리가 단지 썩는 양식, 보이는 양식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좀더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족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떡을 먹고 배가 불렀다고 하더라도 단지 떡만을 추구하지 말고 그것은 표적이고 싸인이고 신호임을 깨닫고 그 본질인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그분께 온전한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대인의 왕을 위해서 나아갔기 때문에 끝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였으면 중간에 그만두었겠지만 그들은 유대인의 왕을 위해서 나아갔기 때문에 때로는 무모해보였고 때로는 어리석기도 했지만 계속해서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그들이 만난 것은 자신들이 찾던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의 별이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동방박사들이 먼저 별을 보았을 때 실망하지는 않았을까요? 그건 찾던 대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랬다면 어리석은 자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별이 아기 있는 곳으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일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에게 아기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아기에게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들을 인도한 것은 별이었고 그 별의 인도함을 따라서 아기에게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도착한 그 아기예수님 앞에서 그들은 진정한 경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지체는 높으셨던 유대인의 왕이셨던 아기 예수님 앞에 그들은 머리를 숙였고, 예물을 드렸으며, 영광을 돌리고 경배를 돌렸습니다. 그들은 단지 아기 예수님을 만난 것 뿐만이 아니라 그 예수님에게로 자신들이 어떻게 인도되었는지를 경험했습니다. 그 자체가 이미 주님은 단지 유대인에게만 왕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왕이 되심을 보여주였습니다.

 

이제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드리고자 하는 계획이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자신들은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러 간다고 말해줍니다. 그 계획을 듣고 헤롯왕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소동만 일으키다가 끝났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동방박사들처럼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표적을 따라 왔고 인도하심을 따라 이 한해를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나아가 주님께 경배를 드리는 이 의미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모습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서 경배를 드리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분을 통해 구원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 경배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왕이 아니고 주님이 왕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백성들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배를 드리고자 하는 계획에 동행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학교생활에서 예수님께 경배드릴 계획을 세워보십시오. 직장생활에서 예수님께 경배드릴 계획을 세워보십시오. 가정생활에서 예수님께 경배드릴 계획을 세워보십시오. 교회생활에서 예수님께 경배드릴 계획을 세워보십시오. 그래서 마침내 동방박사들이 먼길을 찾아와 별의 인도함을 받아 아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 그렇게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보이지 않는 가치와 의미를 깨달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을 찬양할 수 있는 진정으로 그분의 백성되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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