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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충만] 2출 15; 22-27 채움과 충만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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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출 15; 22-27 채움과 충만의 차이_1

 

 2013.11.3.주.주일오전

 

*개요:    5충만, 1역사서, 5은혜-6결심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1)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채움이라는 말과 충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채움이란 채우다는 동사의 명사형인데 채우다라는 동사는 사전적으로 ‘일정한 공간에 사람, 사물, 냄새 따위가 더 들어갈 수 없이 가득하게 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채움이란 어느 공간에 무엇인가를 가득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충만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한껏 차서 가득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득하게 하려는 것은 채움이고 가득찬 상태는 충만이 됩니다. 이렇게 단어의 의미로 ‘채움’과 ‘충만’을 비교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실제적으로 체감하는 것으로는 채운다는 것은 가득차기 위한 과정과 그 결과를 의미하고 충만이라는 것은 가득 찬 그 결과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채움은 100%에 이르기 전의 80%부터 90%, 그리고 마침내 100%에 이르게 됨을 의미하고 충만은 언제나 100%를 의미합니다.

 

왜 이렇게 ‘채움’과 ‘충만’의 의미를 비교했는가 하면 우리는 신앙생활속에서 충만하려고 하지 않고 채우려고만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늘 신앙생활의 핵심은 충만함에 나아가는 것에 있는데 우리는 충만을 사모하기 보다는 채움에만 급급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에 무엇인가를 채우려는 노력 속에서 늘 갈급해하고 결핍을 느끼고 허전해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얼마나 잘 채웠는가가 아닙니다. 얼마나 충만한가가 중요합니다. 이 차이를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에게 바구니가 하나 있다고 해 보십시오. 채움이라는 것은 이 속에 바닷물을 채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바닷물을 채우고 나면 또 이 바구니는 점차 비워집니다. 물은 사용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다시 비게 되고 그러면 또다시 채우려고 합니다. 그속에서 악순환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충만은 다릅니다. 충만이란 그 바구니를 바다로 가지고 가서 그 속에 담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만은 바구니가 바닷물 속에 잠기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속에서 바구니는 바닷물로 ‘충만’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속에 채우려고 하지 말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충만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은혜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가지고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속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충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과 결핍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때 단지 ‘채움’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충만’에 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지금 우리가 본 채움과 충만의 차이가 잘 나타나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어느때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하였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을 향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야를 지나고 있었는데 한 지역에서 물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써서 먹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곳의 이름은 ‘마라’라고 이름붙여졌는데 왜냐하면 그곳의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쓴 맛이 나는 것은 단지 물 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도 썼습니다. 그래서 그 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지독한 원망이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진정으로 쓴 것은 단지 물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물문제를 해결못하시지 않으시겠지만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을 하는 그들에게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어쩌면 좀 성급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은혜가 아니라 마스크라고 말할 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입에 지퍼를 달아야 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입만 막을 뿐이지 마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아무 말도 안하는 것이 가능할 지는 몰라도 다른 상황이 되면 터져나오는 말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말은 정말 안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행동을 참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변해야 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쓰고 마음이 악하고 마음이 괴롭다면 그 쓰라림은 반드시 밖으로 터져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명한 신학자는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게 온화한 언행과 성품으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나이들어서 치매에 걸리게 되었을 때에 그를 막고 있던 모든 제어장치가 다 풀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너무나 악하고 강퍅한 말들이 튀어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다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단 한사람만은 그 말이 왜 나오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였습니다. 우리는 정말 언젠가 찾아올 노년을 준비하면서 우리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쓴마음이라면 빨리 그 마음이 단마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쓴마음을 단마음으로 바뀌어지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정하사 그 나무를 물속에 넣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물이 달아졌고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한 나무를 물에 넣었을 때 그 물이 달아지는 것을 경험케 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물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쓴물이 단물로 바뀌는 것처럼 쓴마음이 단마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로 인해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쓴물은 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단물이 되면 그 물로 인해서 갈등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쓴마음으로 나오는 모든 말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조소와 조롱과 비난과 멸시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단마음으로만이 진정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쓴마음에서 단마음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그가 지시하시는 대로 하기만 하면 바로 그러한 은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의 집앞 골목에서 일단의 중학생 아이들이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큰딸이 그 애들이 학교에서도 유명한 문제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어린 학생들이 어떻게 저렇게 담배를 피워댈 수 있느냐고 성토하는 말도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런 모습이 어이없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화도 났습니다. 처음에는 몇번 그냥 지나갔지만 그때에는 정말 한마디를 해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하게 하실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할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대여섯명이 모여있는 그 아이들에게로 당당하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애들아 너희들 집이 이근처니?” 그러니까 한 아이가 자기들은 여기에 안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또 말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나는 너희들이 집에서는 답답해서 밖에 나와서 담배를 피우는줄로 알았거든” 그러자 아이들은 눈치를 챘는지 자기들은 이제 갈꺼라고 슬금슬금 자리를 떠났습니다.

 

물론 더 좋은 말도 많이 있었겠지만, 저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제 마음이 쓴마음에서 단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단마음으로 말할 때 여러가지 불평과 불만들을 잘 소화해 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은혜는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뿐만이 아닙니다. 이일을 수행한 모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은 모세에 대해서 원망하였고 그로 인해서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세 자신에게도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기 때문에 그 자신도 쓴마음에서 단마음으로 바뀔 수 있었습니다. 그가 평생 그렇게 살았다면 좋았겠지만 딱 한번 동일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향해 성을 내면서 쓴마음을 내뱉었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늘 우리가 하나님의 의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쓴마음에서 단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입장이 따르는 자이건 아니면 이끄는 자이건 간에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까 ‘채움’과 ‘충만’의 의미의 차이를 보았지만, 여기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물에 던지게 하셔서 그 물이 달아지게 된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채움’을 향해서 노력하지 말고 ‘충만’을 향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채움만을 원한다면 늘 그때뿐일것입니다. 다시 마음은 악해지고 다시 쓰게 되고 다시 괴롭게 되어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충만을 사모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이것은 하나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쓴마음을 단마음으로 고쳐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치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은 온전한 변화를 이루시며 완전하게 마음이 달라지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때 괴로움만 면하게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완전히 변화되어서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그 충만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은혜를 담으려는 것에 머무르지 말고, 그 은혜에 우리 마음을 담으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완전히 그 은혜 속에 풍덩 빠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더운 여름날 시원한 물 한모금을 마시는 것과 시원한 물속에 들어가서 앉아있는 것과 무엇이 더 시원하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더 새롭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물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목을 축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 속에서 살고자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하게 치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 안에 있을 때에 비로소 모든 결핍이 채워집니다.

 

룻기 2장에는 남편을 잃었지만 시어머니를 따라서 이스라엘로 들어온 룻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룻이 이제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는 시어머니를 따라서 이스라엘에 들어온 이유는 그녀가 시어머니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따라가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룻기 1장 16절을 봅니다.

“ 룻기 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그곳에서 그녀는 처음에 이삭줍기를 시작합니다. 아주 보잘것 없는 일이었지만 그일을 성실하게 잘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는 보아스라는 토지주인을 만나게 됩니다. 보아스는 룻이 어머니의 하나님을 따라서 모압에서 이스라엘로 왔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고 친절하게 잘 대해줍니다. 그리고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이 보아스를 만났다는 사실을 듣고 자부인 룻에게 말합니다.

“룻2:22 나오미가 자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23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 시모와 함께 거하니라”

 

룻기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나타나지 않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했던 룻을 인도합니다. 결국 룻은 그렇게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을 듣고 보아스의 밭에 머무르면서 결국에는 보아스의 아내가 됩니다. 룻이 복을 받아 이삭줍던 소녀에서 보아스의 아내가 되고 나중에는 다윗왕의 할머니가 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한 두번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진정으로 변화를 이루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안에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충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채워주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을 누리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순간 순간의 목마름을 달랠 수 있는 단물로, 우물로, 오아시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영혼의 안식을 누리는 하나님께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마라에서 더 나아가 엘림에 이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엘림은 마라보다 훨씬 더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의 존재는 정말로 하나님의 충만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장막을 치며 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이 목적지는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따라 살 때에 얻는 그 충만함을 보여주시는 것뿐이었습니다. 엘림이 좋기는 하지만 엘림을 보며 나아가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갑시다. 그럴 때 하나님은 마라보다 더 좋은 엘림으로 엘림보다 더 좋은 가나안으로 가나안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나라로 여러분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누리시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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