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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결심] 19시 7; 10-17 하나님의 의를 따라 감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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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7; 10-17 하나님의 의를 따라 감사함_1

 

 2015.11.1..주일오전.

 

*개요:    감사하는 성도, 3분석, 3시가서, 6결심

 

[]7:10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7:12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7:13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7:14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7:15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7:16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7:17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성경에 감사라는 단어는 구약에 126개 신약에62개 총 188개가 있습니다. 이중 시편에 75개가 몰려 있습니다. 전체 단어의3분의 1정도가 바로 시편에 몰려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시편에서 감사라는 단어를 찾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감사가 아무 의미없이 나타나기만 하지 않습니다. 시편에서 감사라는 단어는 그렇게 감사하는 이유와 함께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에서의 감사를 살펴보며 감사할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무턱대고 무조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와 원인을 가지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드리는 감사는 구체적인 우리의 마음의 표현이 됩니다.

이렇게 많은 감사의 이유들 중에서 오늘 성경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따라서 감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있기 때문에 그 의로 인해서 감사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왜 그 의를 따라서 감사한다고 말한 것일까요?

 

먼저 시편기자는 10절 말씀에서 그의 방패가 바로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7:10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그 방패는 마음의 방패입니다.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방패가 바로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의 방패가 있습니다. 어떤 유혹이나 공격을 받아도 견딜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자신의 자존심이기도 하고 집안의 명예이기도 하고 우월한 도덕성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은 전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어떨 때 그러한 근거는 스스로 버티지 못하면서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한계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하지만 그 방패가 하나님일 때 그 방패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방패가 하나님일 때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은 강하시고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부정하며 하나님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공격하여 그분의 심판과 형벌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적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설사 그렇게 하나님과 적이 되려고 한다하더라도 그는 전혀 적수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그 어떤 존재보다 월등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권능이 충만하신 하나님이 악하거나 불의한 분이었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로 의롭고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의로우심은 바로 이러한 본성가운데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의 방패로 삼는 사람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분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마음이 정직하여서 그러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자신을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방패로 삼는 그 사람이 바로 마음이 정직한 자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하나님을 의지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위급할 때 경찰을 부르는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경찰을 부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경찰에게 쫓기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경찰로부터 도망가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정직한 자는 그렇게 정직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찾고 부르며 의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의 방패로 삼는 사람은 마음이 정직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해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7:12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7:13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악간에 판단하십니다. 매일 악에 대해서 분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을 때 칼을 사용하시고 활을 당기십니다. 그 활의 화살은 불화살이기 때문에 악인은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불화살을 통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 죽음은 바로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심판이자 형벌이 됩니다.

 

여기까지 보면 시편기자는 선악에 있어서 분명한 구별을 하고 있으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아주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자세히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러한 시편의 내용을 쓸 수 있었던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7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제가 달려있습니다.

[다윗의 식가욘,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드린 노래]

식가욘은 가변곡을 의미하는 것이고 내용상 고통과 기쁨, 탄식과 감사가 가변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베냐민인 구시의 말이라는 것은 그 당시 왕이었던 사울왕에게 다윗에 대해서 악하게 이야기하는 말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다윗은 자신에게 악하게 이야기하는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대해서 억울하고 원통하게 여기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의로움과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이 시편 속에서 다윗은 승자가 아니라 패자입니다. 강한 자가 아니라 약한 자입니다. 억울하게 비난을 받는 자이며 악인에게 의해 모함당하는 의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고통과 괴로움을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의지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선악간에 판단하실 분이시라고 믿고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가지고 계시는 선과 악을 판단하시는 모든 능력과  죄악에 대한 구체적인 심판의 방법을 그는 믿고 따랐기 때문에 억울하게 고통당할 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 우리의 방패가 되시고 우리가 옳다고 믿는 그것을 지켜주시고 도와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우리의 대적이 있습니다. 항상 우리를 쓰러뜨리고 우리를 넘어뜨리고 우리를 낙심시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가 우리의 것을 빼앗고 우리의 위치를 박탈하며 우리를 넘어뜨리는 모든 사람을 전부 악으로 규정해버릴 수는 없습니다. 가족들끼리 먹을 것을 가지고 다투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가족들 보다 먼저 먹어버리는 사람이 있고 나중에 먹으려고 남겨놓았다가 못먹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일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가리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선악을 판단하기가 애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에서 가장 공정하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확실하게 선과 악을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바로 의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하심과 하나님의 벌주심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그분을 방패로 삼는 그 사람이 바로 의인입니다. 그러면 모든 옳고 그름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게 됩니다. 욕심을 부렸던 사람이 후회를 하고 양보했던 사람이 더욱 좋은 것을 얻게 됩니다.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선과 악을 다투기 어려운 경우가 아닌 분명히 심각하고 죄악된 일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다윗의 경우에도 그가 받았던 억울함과 생사를 좌우하는 모든 고통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왕의 그 끊임없는 미움과 분노와 시기심 때문에 그는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또한 그의 주변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다윗을 숨겨주었다고 제사장 아히멜렉과 다른 제사장 85명이 사울의 신하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한 제사장들이 살고 있던 성읍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먹이들과 소와 나귀와 양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끔찍한 살인의 현장에는 악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도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4-16절을 읽어봅니다.

“[]7:14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7:15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7:16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악인은 더 큰 죄악을 낳았습니다. 그 악을 버리지 않을 때 재앙을 만들었고 그 재앙이 더 나아가서 거짓을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죄악을 더욱 정당화하고 더욱 숨기기위해서 웅덩이를 파 만들었는데 그로 인해서 자신이 만든 함정에 스스로 걸렸습니다. 결국 그 모든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는 더욱 포악해졌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의 포악함이 자기 정수리에 내려서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사실 일찍부터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을 따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진정한 의인이 되어가지만 악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죄악을 중단하지 않음으로 결국에는 더 큰 죄를 짓고 자기가 만든 모든 악에 의해서 그 스스로 포악해집니다. 그리고 그 포악함의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됩니다. 그 모든 악한 일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악해짐을 스스로 막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알고 나면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의 방패로 삼아서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따라 나갈 때 우리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의롭게 되어집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바로 요한복음 2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2장에는 예수님의 성전청결사건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성전에서 이것을 가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이것은 가히 개혁적인 일이었고 이러한 모습을 예수님의 분노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분노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전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 돈 바꾸는 사람들이 이 예수님의 모습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옳은 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의로움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의로운 분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단순히 그 시기에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 성전이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예수님에게 유대인들이 나아와서 물었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이 말은 성전을 청결하게 한다고 하였으니 이제 앞으로 무슨 일을 행하려고 하느냐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들이 성전을 헐면 그 성전을 3일만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 성전은 바로 자신의 육체를 의미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으로 끝나신 것이 아니라 그 성전을 온전히 새롭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의 소나 양이나 비둘기 등으로 진행되는 제사가 아닌 온전한 죄사함을 얻게 하시는 자기 자신이 대속제물이 되셔서 죽으심으로 모든 성전에서의 제사를 완성하시는 것을 뜻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서 자신을 버리시고 성전을 온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의로움에 대한 열정과 마침내 이루신 거룩한 희생의 모습을 생각하고 그 모습을 따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우리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며 선과 악이 혼탁해져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진정한 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분명한 방식이 됩니다. 다윗도 베냐민 사람 구시의 말로 인해서 실족할 뻔 하였지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 자신이 더욱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 모든 억울함을 갚아주심을 생각하면서 악인이 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할 때에 예수님이 성전청결로 끝난 것이 아니라 더 크고 온전한 새로운 성전을 만드셨던 것처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이 바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이루어집니다. 감사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인해 하나님의 변화의 손길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7편의 기자인 다윗은 노래합니다.

“[]7:17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그 의를 따라 감사함이 그로 하여금 지존하시고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사를 기억하며 우리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로 나아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의 의를 따라서 감사할 때에 우리도 그의 의로 나아가고 주님이 선악간에 판단하시고 의인과 악인 사이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나타내실 것을 소망할 때에 더욱 주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11월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선악의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의로움을 따라 감사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충만하게 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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