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욘]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욘]1: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욘]1: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욘]1: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욘]1: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지금까지
우리는 2명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데 어려움을 갖게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처음 보았던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비난과 멸시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다가 더욱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던 선지자이고 다니엘은 상황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다가 그 어려움을 이겨냈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모습과는 또 다르게 오늘 우리가 보는 선지자 요나는 대상에 대한 거부감으로
복음증거를 거부하다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돌이키게 된 선지자였습니다. 요나가 왜 전도대상자에게 복음을
증거하기를 거부하였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앗수르의 니느웨에 복음을 증거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라고 했으면 얼마든지 순종했을 텐데 하필이면 앗수르의 니느웨에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이 그에게는 거부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마자 곧장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욘]1: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욘]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다시스는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와는 정반대방향의 목적지였습니다. 욥바는 다시스로 가기위해 도착한 항구였습니다. 그리고 욥바에 내려가자 마자 그는 마침 다시스로 떠나는 배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배를 탔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욘]1:3...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서 1장 3절에 여호와의 얼굴을 피한다는 것이 두 번이나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났고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배에 올랐던 것입니다. 다시스로 가기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또한 욥바에서
배삯을 주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는 것도 잘못이 아닙니다. 잘못은 바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잘못입니다. 그런 이유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서 행하는 모든 것이 다 죄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강도만난 자를 피해갔던 제사장과 레위인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도 마침 제사가 있고 마침 정결규례의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피해갈 때에 그것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더 기뻐하시는 것을 이룰 수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전도에 대해서 적용해 보면 복음을 전하지 않을 때 우리는 날마다 그렇게 피해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다시스로 가고 날마다 욥바로 내려 갑니다. 그리고
날마다 마침 오는 배를 탑니다. 그러다 보니 앗수르의 니느웨로부터는 아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는 신경쓸 필요가 없는 대상도 되어 버립니다.
애초에
요나가 이렇게 니느웨를 피하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전도 자체를 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라고 했으면 당장 복음을 전하였을 것입니다. 문제는
니느웨에 전하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앗수르는 100여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에게
하나님께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것은 그들을 살리고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앗수르가
망하게 되기를 바라던 요나는 도저히 그런 선포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를 멀리 떠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니느웨는 아주 가까이 있었습니다. 니느웨를 피하기 위해서 아주 멀리 왔는데 사실은 그곳에서 니느웨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다 한가운데서 다시스로 향하는 배 속에서 그는 니느웨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욘]1: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욘]1: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하나님께서는
바다 한 가운데 있는 배를 향해 큰 바람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큰 폭풍이 일어나서 그로 인해서 배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폭풍을 만나서 파선하게 된 것입니다. 사공들은
죽을까봐 두려워하면서 자신들의 신을 불렀습니다. 또한 배가 무거워져서 침몰하는 것을 막으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급박한 와중에서도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있으면 배도 침몰하고 사공들도 죽고 그리고 요나도 죽을 것입니다. 눈앞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 요나의 모습은 너무나 태평했습니다. 또한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바로
‘니느웨’였습니다. 아까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욘]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들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고 이제 곧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었습니다. 눈앞에
자신들의 멸망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들은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향락과 즐거움에 취해서
눈이 멀었고 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잠에 빠져있던 요나처럼 말입니다. 그러한 니느웨를 깨워주어야 했습니다.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려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당시
앗수르는 이전 왕들의 통치시대에 비해 국력이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북방국가인 아라랏과의 전쟁이 장기화되어서
약해지기도 하였고 큰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고 일식현상으로 인해서 온 나라가 칠흙같이 어두워지는 불길한 일도 있었습니다. 여러모로 회개의 복음을 전하기에 적절한 때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때에 요나가 가서 그들에게 구체적인 회개를 선포하고 그들이 회개하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지만 요나는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오직 ‘니느웨 멸망, 앗수르 심판’만을 바라면서 다시스로 도망쳐 버렸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거부할 때 요나는 자기 자신이 ‘니느웨’가 되는 불쌍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더욱 그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누군가 자신을 깨우는 ‘요나’같은
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정말 ‘요나’같이 하나님을 찾으라고 촉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욘]1: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 선장은
하나님과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지금 요나에게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요나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요나는 ‘니느웨’가 되어버린 지금 잠에 빠져서 상황파악을
못하는 그에게 그 영적인 잠에서 일깨우며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알게 하는 그 선장의 모습이 바로 ‘요나’자신의 모습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을 고집하고 돌이키지 않을 때 그는 자신이 구원을 선포했어야 하는 ‘니느웨’의 모습이 되고 말았고 자신이 나타냈어야 하는 선지자의 모습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종종 신문
사회면에 올라오는 사건 중에서 정말 아이러니한 사건중의 하나는 경찰이 죄를 짓고 구속되는 일입니다. 범죄자들을
구속하는 역할을 하는 경찰이 뇌물을 받거나 성폭행을 하거나 음주운전을 하거나 기타 등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결국에는 동료경찰에 의해서 구속될 때
그 마음이 어떨까 싶습니다. 자신이 법을 수호하고 국민을 보호하며 사회의 안전을 지킬 때에는 무한한
능력이 주어졌지만 어느 순간 돌아서서 법을 어기고 국민에게 피해를 주며 사회의 안전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는 천사에서 악마로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함께 도둑을 잡고 범죄자들을 구속하여 법정에 세우는 일을 하던 동료경찰에 의해서 구속되고 맙니다. 이 얼마나 모순된 모습입니까?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구원을 믿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이 어느새 그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거부하면서 성령님의 은혜주심을 피하고자 할 때에 그는 가장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멀어진 자들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일어난 모든 어려움과 환란과 고통의 원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버립니다. 주변사람을 힘들게 하고 가족을 고통스럽게 하고 자기 자신이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져 버리게 되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도 그랬습니다.
“[욘]1: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사람들은
제비를 뽑아 이 바다에서 일어난 폭풍과 침몰의 위험과 사망의 고통이 누구로 인해서 생겼는지를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이 세상 만사에 항상 이러한 원인제공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원인제공자가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구나 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제비를 뽑게 되었을 때 그 모든 폭풍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제비를 뽑기 이전부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 삶속에서도 그것은 너무나 분명하게
일어납니다.
아버지가
도박을 해서 가산을 탕진했을 때 그 원인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어머니가 다른 사람의 빚에 보증을 서주다가
가세가 기울게 되었을 때 그 원인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아들과 딸이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악을 행할
때에 그 원인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범죄를 짓거나 형제나 친구가 죄악을 저지르거나 해서
그와 연계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일이 있을 때 그 원인제공자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특히나
그런 원인제공자가 사실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하고 사실은 하나님을 따라야 하는 자였지만 그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세상을 따르기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는 타고난 죄성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착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만이 우리는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어떤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을까요? 열심히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다하였다면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그런 일들을 잘 이겨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더 중요시하고 자신의 계획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더 커버린다면 어느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사탄도
예전엔 광명한 천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고 할 때 그는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나는
그 폭풍속에서 자신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왜 니느웨에
회개를 외치게 하시는가에 대해서 요나서4장 10절에서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욘]4: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욘]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옳고 그름을 분변하지 못하는 십이만여명과 그들과 함께 있는 가축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요나는 오직
정치적인 국가요 수도인 앗수르나 니느웨만을 보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과 그들의 가축들을 보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요나도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지금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도망쳐나가고
하나님의 일들에 관심을 끊고 있는 요나도 불쌍한 자였습니다. 또한 요나로 인한 폭풍 속에서 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배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불쌍한 자였습니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바로 이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니느웨를 긍휼히 여기셨고 요나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지금도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나이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장년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한 청년들과 소년들과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요나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요나가
이것을 깨달았을때 그는 하나님께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속에서 그는 죄인인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바다에 던졌고 그 긍휼히 여기심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커다란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그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속에서 다시 육지에 토해
내게 하셨습니다. 다시 살아난 요나는 니느웨를 향해서 나아갔고 니느웨에 도착해서 회개의 복음을 선포했을
때에 하룻만에 성읍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예고하셨던 멸망을 거두셨습니다. 요나가 돌이켰을 때에 살았던 것 만큼이나 니느웨도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왜 니느웨가 멸망을 예고받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악독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그들은 그에 대한 심판을 앞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왜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에서 폭풍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요나의 불순종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그는 그에 대한 심판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끝나지
말고 그 원인을 알게 하여서 그들이 돌이키게 해야 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복음을 받고 그들의
죄에서 돌이키게 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그 심판하심 속에서 깨닫고 돌이키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커다란 손길 속에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 스스로 돌아서게 되고 그리고 다른 사람도 구원으로 돌아서게 하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