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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수치] 24렘 20; 7-12 여호와의 권유하심으로 인한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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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_1004-111845.mp3

 


24 20; 7-12 여호와의 권유하심으로 인한 괴로움_1

 

 2015.10.4..주일오전.

 

*개요:    전도의 사명’, 6결심, 3관점, 4선지서

[]20: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20: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20: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20: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20: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9월 추석명절을 잘 보내고 10월로 들어섰습니다. 지난주일은 추석당일이 주일날이라서 많은 분들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주일예배가 너무 썰렁할 것 같아서 걱정을 했는데 그래도 남아계신 분들이 계셔서 옹기종기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추석명절은 여러가지로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화기애애하고 화목한 시간이면서도 또한 가장 갈등과 다툼이 이어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참 모순적이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가족, 친척, 동기 들이 함께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렇게 모여있기 때문에 모든 시기와 미움과 분노와 갈등도 함께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명절기간에도 역시 사건사고가 많이 있었습니다. 취업하라는 아버지의 잔소리에 아버지를 칼로 찌르는 아들이 있었고 남겨진 재산에 대한 불만으로 형수님을 칼로 찌른 시동생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손자를 돌보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손자가 아파트 바닥으로 떨어져 사망한 일도 있습니다. 명절에 차량으로 이동하다가 추돌사고로 인한 인명피해가 나거나 접촉사고로 인한 재산피해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명절은 큰사고 없이 그나마 조용하게 지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오히려 더 큰 사고가 없었던 것이 안도감을 들게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여러 사람이 모이고 다양한 행사들이 생길 때마다 사건사고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 갈등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명절후유증으로 인해서10월달에 이혼신청이 가장 많이 접수되는 달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어떻게 또다른 갈등과 미움이 자라나고 있을 지 모릅니다. 시댁에 대한 불만이나 처가에 대한 반감 혹은 부부나 부모자식간이나 혹은 형제들간의 갈등이 어떤식으로 커져나가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모든 갈등이 뻥하고 터져버리면 사건이나 사고가 되어버립니다.

이 모든 일들의 근원을 생각해 보면 애초에 그런 만남이나 교제나 연합같은 것이 차라리 없었으면하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관계가 친밀하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시댁에 가는 며느리들은 얼마나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까? 차라리 명절이 없었으면 하지 않습니까? 또한 처가집에 가는 사위들도 역시 얼마나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겠습니까? 그런 불편한 자리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딸이나 아들은 그런 생각을 안합니다. 오직 며느리와 사위들이 그런 생각을 할 뿐입니다. 또는 어떤 위치가 아니더라도 만남이 좋으려면 그 만남이 어떤 관계로 만나는가가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간에 불편하고 어려운 관계로 만날 때 그 만남은 부담감과 갈등만 만들게 됩니다.

 

이러한 원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쁘고 즐거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렵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동일한 대상이지만 관계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마음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이미 예레미야 1장에서부터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었고 하나님의 세우시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1장에 보면 그가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었는가가 나타납니다.

“[]1: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1: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처음 하나님과의 관계는 좋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에 그를 알고 계셨고 그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비록 그 자신을 아이라고 말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담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말해야 하는 자들에게 그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좋았습니다.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관계는 친밀하였고 원만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예레미야도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따라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함께 읽은 예레미야20장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20: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20: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그는 이전에 주님이 주신 부르심과 권유를 받았습니다. 그럴 때 주님은 예레미야를 순종하게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도 역시 주님께 순종하여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어려움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그는 조롱거리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조롱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에게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게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회개와 죄의 고백을 외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파멸과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전하게 하시는 그 파멸과 멸망의 말씀으로 인해 예레미야는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섬기며 깊은 관계를 갖는 것은 좋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전하게 하시는 것은 심판과 멸망입니다. 물론 우리가 축복과 번영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심판과 멸망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백번 축복을 말하다가도 한번 심판을 이야기할 때 기분상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백번 잘한다 잘한다 해도 한번 그건 못했다라고 하면 마음 상하는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증거하게 하시고 전파하게 하시는 그 내용에 대해서 언젠가는 마음에 불편함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의 행위와 삶의 모습에 대해서 책망하시고 질책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판단하심과 평가하심은 단지 우리 자신에게만 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한 예레미야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한 말씀에 대해서 증거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에 대해서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도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어버립니다.

명절에 만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전도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힘든 일입니다. 믿지 않는 부모님께 복음 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형제들에게 복음 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자녀들에게 복음 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분위기가 냉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그런 이야기 하지 않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마음이 편한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그래서 아무 말 안하기로 하면 그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칠 정도가 됩니다.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마음 속의 깊은 스트레스가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복음을 증거하자니 반응이 안좋아서 하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안하자니 마음이 편치 않고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으면서 괴로움만 겪게 되는 것이 바로 예레미야의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때로 이런 마음을 겪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복음을 전하자니 어렵고 그렇다고 안전하자니 마음이 안 편한 바로 이 어려움이 명절기간에 여러분이 혹시 느껴보았을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다 지나버렸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말이지요.

 

이 모든 갈등의 시작은 애초에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혹은 하나님을 만났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차라리 몰랐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명절 스트레스를 해결하려는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저런 이유로 마음이 불편할 것이라면 차라리 명절에 만나지 말자, 명절에 오고 가고 하지 말자, 그냥 자기 있는 곳에서 원래대로 평상시처럼 살아가자 라고 하면서 극단적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방편은 될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해결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중요하고 더 가치있는 것도 함께 없애버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병을 고치는 방법이 환자를 죽이는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를 가려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 그 아이를 반으로 잘라서 나눠갖는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방법이 어리석은 것처럼 관계에 대한 문제를 관계 자체를 없애버리면서 해결하고자 한다면 결국에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말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내가 사라짐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가장 악한 그 누군가를 따라가는 것 뿐이지 결코 어떤 선한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해결책은 단지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제가 선하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이 온전하고 완전하신 선입니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라면 모두가 다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 모든 세계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할 때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온전하게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괴로움은 어떻게 선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 괴로움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함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더욱 바짝 달라붙을 때에 비로소 그 괴로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괴로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업을 때에 어중간하게 업힌다든지 아래로 밀려내려가 있다든지 하면  부모도 힘들고 아이도 힘듭니다. 부모와 아이의 사이가 딱 달라붙어 있으면 부모도 힘이 들지 않고 아이도 힘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당하는 괴로움과 모욕과 수치심으로 인해서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그가 알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과 멸망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서 왜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셨을까요? 예레미야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기만 하는 것뿐이었지 더욱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갖고 계시는 마음은 몰랐습니다. 그것은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것에 대한 하나님의 괴로움이었습니다.

“[]2:5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2:6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구원받기 어려운 자에게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또한 받아야만 하는 자들에게 그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을 찾을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 안에 있던 자들이라도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을 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떠날 때에는 구원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생할 수 있는 이유도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수와 생명나무의 실과가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는 것이지 그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결코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통해서 돌아오게 하십니다.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증거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을 때 다시 하나님을 굳게 붙드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예레미야는 이렇게 증거하였습니다.

“[]20: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20: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주님께 능력이 있어서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이 큰 치욕을 당하게 되고 주님으로부터 큰 보복을 받게 되는 것을 기대할 때에 그는 하나님과 친밀한 자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의존할 때만이 의미가 있고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심판이든 구원이든 멸망이든 축복이든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것은 그분과의 밀접한 관계가 있을 때에 비로소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래서 처음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말하였을 때에는 괴로움을 느꼈으나 나중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안에 들어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전하게 하시는 복음의 말씀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져야 하는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신호입니다. 그것을 느끼면 느낄 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 보십시오. 그리고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안으로 더욱 들어가게 되고 그럴 때 마침내 복음 때문에 갖는 괴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갖게 되는 복음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명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간의 만남은 우리를 힘들게도 하고 기쁘게도 합니다. 단지 나 자신의 힘들고 기쁜 것만 생각하면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기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명절의 깊은 의미가 관계에 있었음을 기억한다면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 보십시오. 비로소 그 관계가 친밀하게 느껴지고 비로소 삶은 이러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마음의 충만을 얻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충만을 깨닫고 세상 사람들을 향한 복음을 들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함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기쁨과 소망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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