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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죄책] 66계 1; 9-20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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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2015_0906-112151.mp3


66 1; 9-20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자들_1

 

 2015.9.6..주일설교

 

*개요: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 6서신서, 5은혜, 3분석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고 그분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들이지만 사실 삶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은 매우 드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고 우리의 행동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더 관심이 있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시자 우리가 마땅히 바라봐야 하는 그리스도께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이고 영접하는 마르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일로 인해서 매우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동생인 마리아는 주님 옆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마르다는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 마리아에게 말씀하셔서 언니를 좀 도와주라고 해주세요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더 좋은 편을 선택했으니 빼앗기지 않을 거다. 그리고 너도 좀 여기 앉지 그러니?’

우리가 정말 믿고 따르는 예수님께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혹은 지금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좀 갖고 귀를 기울이고 따라가다 보면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아서 시간이 흐르다 보면 정말 믿음을 갖게 되고 이제는 따라야 하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 바로 그분에게 관심을 갖는 일에 항상 소홀하다보면 아무리 시간이 가도 믿음이 생기지 않게 되어버립니다. 또한 믿음이 있었다 하더라도 괜히 더 반감만 갖게 되는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나오는 사도 요한은 예수님 때문에 밧모라는 섬에 갇혔던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사도요한이 말하는 이 밧모(파트모스)섬은 에게 해에 산재해 있는 3,000여 섬 중 하나입니다. 로마제국 시대에 밧모섬은 정치 종교 중범자들의 유배처였고 한 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든 생지옥이었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서기 95년경 로마 도미시안(Domitian)황제 때 이 섬으로 유배를 와서 18개월 유배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황제가 암살을 당해서 죽은 이후에 서기 96년에 에베소로 귀향했다고 합니다. (간혹 어떤 신학자료 중에는 요한계시록이 사도 요한이 쓰지 않았다고 하거나 유배를 당해서 기록한 책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러한 내용은 초대교회의 전승과 기록을 통해서 증거되고 있는 내용들이니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그가 밧모섬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은 다시말하면 바로 예수님 때문에 밧모섬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배를 당하고 그곳에서 고초를 겪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들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말 그곳에서 사도 요한은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만약 가상적으로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다가 밧모섬에 유배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유배된 것이었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혹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유대되었더라도 예수님을 원망하고 거부하거나 또는 예수님에게 무관심하고 다른 자신의 바쁜 일에 몰입하고 있었다면 과연 그의 뒤에서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혹은 그 음성이 어디에서 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몸을 돌이키기라도 할 수 있었을까요?

아까 살펴본 마르다의 경우에서도 마르다는 예수님과 대화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목적에 관심이 없고 자신의 목적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서 말씀을 잘 듣고 있는 마리아나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설교하는 제가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제가 하고자 하는 말에 관심이 없거나 바쁘거나 졸리거나 경황이 없을 때 그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제가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예수를 위한 바보라는 책에는 남아프리카의 큰 교회 목사님이었던 데이빗 케이프 목사님이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서 십자가와 나무로 만든 대야를 메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고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한 대목에 보면 이 목사님은 혼자서 복음을 증거하면서 다니다가 7명의 불량배에게 에워싸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그분은 으슥한 창고로 끌려가서 문이 잠긴 상태였고 다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위기의 순간에 그는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비록 그곳에서 폭행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게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해서 나아왔던 것에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그를 도와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바로 그때 성령님께서 그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앞에 있는 한 불량배가 지금까지 어떤 짓을 했는지에 관한 것이었고 그는 그것을 그 불량배에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 다음은 그 옆의 사람에게 그가 저질렀던 과거의 죄를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 사람도 더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습니다. 또 그 다음 사람에게 동일한 일을 하고 그렇게 해서 7명 모두에게 성령께서 알게 하시는 신비한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이 목사님을 해치려고 했던 일곱명의 사람들이 죄책감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죄사함을 간구했습니다. 결국 데이빗 케이프 목사님을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회개기도를 시키고 그들의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갖는 커다란 두려움이 우리 앞에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리지 않게 만듭니다. 우리가 갖는 커다란 욕심이 나팔소리처럼 들리는 예수님의 음성에 대해서 귀가 멀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그 모든 혼란스러운 마음을 떨쳐내고 흔들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주님을 바라고자 할 때에 우리 자신이 유배당한 것 같은 이 밧모섬같은 삶 속에서 우리를 만나주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하여 우리의 몸을 돌이켜 도대체 이 음성이 어디에서 나는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1: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가 성령에 감동해서 나팔소리와도 같은 큰 음성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몸을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가 성령에 감동해서 나팔소리와도 같은 큰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밧모섬에 유배당하여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밧모섬에 유배당하여 온 이유는 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그가 예수님을 믿고 그 인도하심을 따랐기 때문에 밧모섬에 이르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신을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고 그 음성을 향하여 몸을 돌이켰고 그곳에서 그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인자를 보았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진실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그는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인자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에 대해서 많은 의심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직접 보고 듣게 되는 체험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 체험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체험은 경험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경험은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알게되는 간접경험입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자들의 간증과 권면과 설득과 조언이 나에게는 경험이 됩니다. 이러한 경험이 먼저 있어야만 체험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조차도 애초에 지식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업습니다. 내가 미술에 대해서 문외한일 때 나는 미술작품을 보고 감탄해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음악에 대해서 문외한일 때 나는 그 음악에 대해서 아무런 감흥이 생기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간접경험 조차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졸거나 다른 일을 하거나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저 자신도 예전에 피아노 음악회에 한번 초대받아 갔다가 내내 졸다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지식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의 경험이 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무르익을 때 바로 체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 예수님의 제자로서 함께 동행하였던 사도 요한은 이전에 만났던 그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만난 예수님은 예전에 만났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일곱 금촛대 사이에 거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일곱 금촛대는 교회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곱 금촛대는 칭찬도 하셨지만 여러 가지 문제도 많고 책망도 하시던 일곱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은 그 교회들 사이에 계셨습니다. 우리는 칭찬은 적고 책망만 많은 교회라서 그 교회를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고 싶은 생각을 할 때에 오히려 예수님은 그 사이에 계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 교회들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그 교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교회들은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세워질 수 있을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만이 그 교회들은 올바로 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들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밖으로 나아가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농락하고 예수님을 무시할 때에 그 교회는 예수님과 멀어지는 것이고 그러면 예수님은 바로 그들과 싸우십니다. 더이상 같은 편이 아니라 적이요 원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단교회들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그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일곱 교회에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바로 이것을 말씀해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을 그리스도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돌이키려고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사가 나 자신과 우리 가족, 남편, 아내, 아들, 딸에 국한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속에서 그리스도에 연결되어 있는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 가정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바라보고 지금 현재를 생각해야 그 현재를 가야하는 곳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습니다. 골프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 목표를 주시하는 지 아십니까? 공을 홀에 넣어야 하는데 공만 바라보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홀을 보고 또 보고 또 본다음에 비로소 한번에 공을 움직여서 홀에 붙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적지인데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분을 바라보면 그분이 보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감추고 숨기고 못오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언제든지 주님께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그분을 잘 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하였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1: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그의 머리털은 흰 양털이나 눈같고 그의 눈은 불꽃같다고 했습니다. 그의 발은 구리나 주석같은 금속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 같다고 했습니다. 그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는 날선 검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비추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전부 무엇 같다고 했지 정말 그렇다고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주십시오. 이상한 상상을 해서는 안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인자의 모습을 상상으로 그린 그림중에는 이상하고 괴상하게 생긴 것들도 많습니다. 그런 시각적인 구체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그 모든 강하고 영광스러우신 모습으로 바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시는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능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깨닫는다면 사도요한이 왜 쓰러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주님은 허상이 아닙니다. 주님은 실체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기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가 죽으면 반드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때 주님은 모든 것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영광스럽게도 죽기 전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오른손을 그에게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1: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전에 죽었었지만 이제는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시고 우리를 위해서 천국의 문을 여시고 사탄과 모든 죄인들에 대해서 지옥의 문을 여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이 살아계시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존귀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는 주님이 주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과거에는 그분앞에서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은 그의 모든 지식과 경험과 체험을 기록하여서 다른 사람에게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한달 우리는 계속 그리스도를 바라볼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이 되겠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경험이 되겠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체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궁극적으로는 결국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만나는 주님의 모습은 나에게 가장 기쁘고 영광스러운 구원이 될 것입니다. 또한 현재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깨닫게 하는 놀라운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같이 나눈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처럼 자신의 주님과의 만남의 체험을 증거할 수 있는 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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