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창]12: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창]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창]12: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12: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해마다 7,8월이
되면 학교가 방학을 하고 직장에선 휴가를 줍니다. 이 시기에 많은 가정들이 집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형편상 그렇지 않은 가정들도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여행이란 해마다 하지 않더라도
어쩌다가 하게 되면 새롭고 설레고 기대되는 시간일 것입니다. 그 속에서 가장 부담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족 중에서 가장 여행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결정을 하고 진행을 맡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정적으로나 계획적으로나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개 아버지나 어머니가 되겠지요. 아니면 두 분이 다 그러한 책임을
지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열심히 여행계획을 세웁니다. 필요한 것들을 마련합니다. 여행을
가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이런 저런 준비를 철저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 어머니는 부모로소 책임감과 부담감이 있습니다. 온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부담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 부담감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여행분위기를 스스로 망칠 수 있습니다.
반면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자신만의 목적으로 가득찰 수 있습니다. 오랜만의 혹은 정기적인 가족여행에서 아들은 아들대로 자신의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투덜거릴 것입니다. 딸은 딸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역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짜증낼 것입니다. 여행을 함께 가기는 하지만 여행 목적이 서로 다를 때 앞서는 사람이 아무리
준비가 잘 되고 노력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이 협조해 주지 않으면 그 여행은 십중팔구 불쾌한 여행으로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따라오는 사람도 그 입장에서 분명한 생각과 마음의 준비를 가진다면 여행은 의미있고 즐겁게 진행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가게 된 여정의 시작은 그가 하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은 가나안을 가기 위해서 온가족을 함께 데리고 가면서 본격적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창]12: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이제 가나안으로의 여정은 아브라함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힘든 것이 될 지, 아니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가족들에게로 전파될 것인지의 기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가족들도 아브라함과 같은 목적을 갖지 않는다면 그들의 가나안으로의 여행은 힘들고
괴로운 것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의 시작은 하나님을 만난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러면서 그 한
사람과 관계있는 여러 사람이 신앙의 여정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각각의
입장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온 가족을 데리고 하나님을 따라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온 가족을 이끌고 하나님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갈 생각을 했을까요? 또한 아브라함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러한 여행에서 도망가거나 따로 자신의 길을 떠나가지 않고 아브라함과 함께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먼저 아브라함의 입장을 생각해 봅니다. 아브라함은 온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그는
혼자서 가나안에 살만한 곳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곳이 정말로 살기에 괜찮으면 가족들을 데리고 와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는 가족들도 다 데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각오를
가지고 가나안으로 떠났습니다. 그 다음 가족들의 입장을 생각해 봅니다.
가족들은 하나님은 볼 수 없었지만 아브라함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결단과
선택에 함께 동참했습니다. 가족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기 이전에 보이는 아브라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었습니다. 그들이 다 남편이자 삼촌이자 주인님을 믿고
따랐기 때문에 그들은 도망가거나 거부하거나 하지 않고 함께 그 길을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 만큼이나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아브라함을 믿고 따라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향해서 나아갈 때에 여러분이 아브라함이거나
혹은 아브라함의 가족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을 만났거나 혹은 하나님을 만난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이끌리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난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을 때 확신도 없고 믿음도
없고 신앙도 없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복을 주시는 분이신지 정말 약속을 지키시는 것인지, 정말
살아계셔서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신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고민할 것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인도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연결고리를 붙든다면 여러분은 마침내 하나님에게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멀리 있는 어떤 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 주고자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가 가장 잘 볼 수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별자리를 보게 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별자리를
바라볼 때 북쪽 밤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기준으로 삼는 것은 북극성입니다. 북극성이 가장 크고 잘 보이기 때문에 북극성을 중심으로 해서 별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북극성을 기준으로 하여왼쪽에 북두칠성와 오른쪽에 카시오페이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확장해서 별자리를 알아갈 수 있습니다. 이 북극성은
영어로 Polaris라고 하는데 지구 자전궤도와 일치하기 때문에 항상 변화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위치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북극성은 지구로부터
약 450광년(연주시차법으로) 떨어져 있습니다. 빛의 속도(1초에 30만 km)로 갈 때 약450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우주선 중에
가장 빠른 속도를 내는 것은 탐사선인 바이킹호입니다. 이 탐사선은 초속30km(시속 108,000km)로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바이킹 호로1광년을가려면1만년이걸립니다. 그러면 북극성까지는450만년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북극성의 밝기는 태양의 2.2배가 됩니다. 참고로 태양까지의 거리는 150,000,000km입니다. 바이킹탐사선의 속도로 가면 55일이 걸립니다.
하지만 이렇게 멀리 있고 밝은 별도 우리에게는 단지 조그마한
별빛으로 밖에 안보입니다. 우주의 가장 위대한 실존도 우리 망막에는 작은 빛으로밖에 비추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존하는 것이고 이제서 우리가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주를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별로 심각하게
밤하늘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또한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인간의 작고 유한함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라는 존재의 뛰어남과 훌륭함에 반해서 저 멀리 작게 빛나는 별들은 다만 나를 위해 비춰지는 조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혹은 예전에는 내가 원할 때 잘 볼 수 있었던 별들을 이제는 잘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자연환경의 변화에 대한 실망감만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밤의 별들을 볼 때 우리는
그 세계를 지으신 분이 계시고 그분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북극성보다 더욱 위대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는 영적감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브라함이라고 한다면 처음에 만났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이전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서 떠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깨달은 뒤에 하나님은 늘 우리 옆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별자리를 깨닫던 깨닫지 않던 간에 별자리는 한번도 여러분 주변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볼 수 있건 혹은
볼 수 없건 간에 보려고 하던 혹은 보지 않으려고 하던 간에 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좋은 것은 그분을 찾고자 하고 만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란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음번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6절입니다.
“[창]12: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났던 때는 가나안땅 세겜에 도착해서였습니다. 그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은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비옥하고 좋은 땅이었기 때문에 역시 누군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실망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잔뜩 기대하고
도달했는데 도착한 곳이 생각과 다른 곳일 때 우리는 낙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의 위치이든지 혹은 아브라함의 가족의 위치이든지
성도로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무엇에 대한 현실적인 실망은 반드시 넘어야만 하는 고비입니다. 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하지만 한번에 들어가지 못하고 실패의 쓰라림을 맛보게 된다든지 직장에 취직하기를 원하지만 쉽게 합격이 되지 않는다든지 원하는 사람과
결혼을 원하지만 이런 저런 문제로 불가능하게 된다든지 하는 문제는 우리 삶속에 늘 존재하는 일들입니다. 여행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생각보다 길이 많이 막힌다든지 날씨가 좋지 않다든지 여러가지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난다든지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사람입니다. 먼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창]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창]12: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세겜에 대해서만
생각하지 말고 이 땅을 바라보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세겜에 가나안 자손들이 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고 이 땅 전체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거주하게 하시는 곳을 찾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후 아브라함은 세겜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아래로 내려가 벧엘 동편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도 다시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부르며 의지했습니다. 가야할 곳을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성장하고 있었고 그것은 아브라함의 가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족은 아브라함을 보면서
함께 그 모든 길에 동참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그 모든 여정 에서 서로 흩어지지 않고 마음이 상하지
않고 하나님께 이끌려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때 문제를 하나하나씩
해결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인도자를 잘 따라주고 협력해줄 때에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임할 수 있었습니다.
양과 염소는 생활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양은 양끼리 뭉쳐있고 염소는 자기 원하는 대로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그
이유가 양은 시력이 안좋아서 주변 양을 의식하고 모여있기를 원하는데 염소는 시력이 좋아서 자기 원하는 대로 흩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소처럼 시력이 좋았으면 알아서 자기 인생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애초에
아브라함이 염소같았으면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염소같았으면 순순히
아브라함을 따라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양처럼 하나님을 따랐고 아브라함의 가족들도
양처럼 아브라함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얻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가나안에서
생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위치라면 아브라함 답게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아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하란에서는 하나님을 만났고 그래서 가나안으로 떠나왔는데 정작 가나안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 하나님을 찾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의 작은 영역이 아니라 더 큰 가나안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전체를 살펴보고
그 속에서 더 좋은 곳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생각대로만 하려고 했다면 너무나
제한되고 폐쇄적이며 유약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랐을 때 더 폭넓고
개방적이며 더 큰 사고를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은혜를 부인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아브라함의 가족의 입장으로서 이 믿음의 여정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고 가나안으로 따라왔던 것처럼 아브라함을 믿고 가나안에서 더욱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며
기다리던 가나안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자리를 펴는가 했더니 지금부터 한참을 더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면 당장 실망과 좌절이 넘쳐날 것입니다. 분노와
짜증이 밀려올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아온 고생에 비한다면 조금 더 움직이는 것을 통해 더 나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그 고생을 마다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우리는 훈련되어지고 성숙되어지고
성화되어집니다.
페루의 선원들이 아마존강을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대한 스페인 배 한 척이 강 위에 떠 있었습니다. 선원들이
스페인 배에 올라가 보니 수십 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습니다.입술은 새까맣게 탄 채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실 물이 없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페루의 선원들이 스페인 사람들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우리에게 마실
물을 주시오. 우리는 지금 물이 없어 죽어가고 있소”
페루 선원들은 아마존 강물을 퍼올려 스페인 사람들을 먹였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정신을 차렸습니다. 스페인 선원들은 사실 넓은 아마존강에
떠 있었습니다. 그러나 넓은 바다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도 바다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으면 마침내 놀라운 소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절망해 버리면 결국에는 그 절망속에서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여정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창]12: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할 때 계속 남방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그 여정은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찬 가나안에서의 방황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확신하며 나아가는 믿음이 성장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앞으로 다가올 큰 시험을 담대히 이겨내며 흔들리지 않게 나아가는 중요한 성장과정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속에도 이러한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시대에 우리의 사람들과 함께 이 과정을 거쳐가고 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것이 반복되는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일들이 지금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아슬아슬함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그럴 때 그 과정을 거치며 믿음이 자라나고 커질 것입니다. 갑각류
생물들이 허물을 벗을 때마다 성장하듯이 우리도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믿음이 커질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여러분 각자의 위치에서 놀랍게 경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결코 여러분이
주변인물이 아니라 중심인물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거듭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