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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영역] 1창 4; 25-5; 5 함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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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 25-5; 5 함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_1

 

 2015.5.24. . 주일오전.

 

*개요:    가정의 달, 7실천,

[]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5: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5: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태어나고 ~살다가 ~죽었더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묘비등에 기록된 내용들을 살펴보면 결국에는 언제 태어나고 어떻게 살다가 언제 죽었다라는 내용이 기록됩니다. 이러한 인생에 대한 설명은 오늘 읽은 말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다는 내용과 함께 시작되는 아담의 일생에 대한 설명은 셋을 낳고 다른 자녀들을 낳고 구백 삼십 세를 살고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5: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이렇게만 보면 인생은 너무 허무한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녀를 낳고 그리고 몇 세를 살고 죽었다고 표현되는 것이 다만 아담의 인생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의 이름을 사람이라고 일컬으셨는데 그 사람이라는 말이 바로 아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은 인간 전체를 일컫는 이름이기도 했고 처음으로 창조되었다가930세를 살고 죽은 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던 인생을 설명할 때에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기억되는 일은 바로 자녀를 낳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인생의 가치 속에서 우리는 가장 큰 허무함 속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이 놀랍고도 위대한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전 저희 지인이가 외할머니에게 난데없이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엄마는 누구야?/ 응 돌아가셨어./ 이름은 뭐야?/....’ 그래서 제가 옆에서 껴들었습니다. ‘왜 그런 걸 알려고 해? 넌 몰라도 돼.’  그때에는 그냥 그렇게 웃으며 넘어갔지만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외증조 할머니와 외증조 할아버지의 이름을 다 알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외가는 물론이고 친가도 역시 마찬가지로 증조 할아버지, 할머니는 다 알지 못합니다. 또한 고조 할아버지, 할머니도 모릅니다. 특별히 제사를 지내지 않는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더이상 살아계시지 않을 때 그와 함께 살아있었던 분들에 대한 기억도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분명 그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자녀만 낳다가 사라지는 우리의 인생이 참 허무하게도 느껴집니다. 결국은 우리 자신도 언젠가는 노인이 되고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낼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의미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자녀를 낳고 살다가 언제 끝났더라는 허무함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연관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련이 되고 하나님과 연결이 될 때 우리의 인생은 가치있게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5 1절부터 이어지는 아담의 계보 이야기 속에서는 허무하지만 그 앞서 나타나는 4 26절 말씀에서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기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의미의 해석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 예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부분에 대한 히브리어는 יְהֹוָה שֵׁם קָרָא חָלַל이고  영어로는 ‘men began to call on the name of the LORD.’ 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외치다, 부르다, 선포하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대한 기도와 간구와 찬양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더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로 그때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는 말이 나왔을까요? 그 이전에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여기에서 중요한 때란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면 아담의 아들이 셋이고 셋의 아들이 에노스가 되니까 3대가 모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3대의 존재는 단순히 한 두 사람의 의미가 아니라 두 세 사람의 의미가 됩니다. 그렇게 여러 명이 모여서 하나님을 섬길 때에 그들이 비로소 공적인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3대가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1대의 예배는 개인적인 의미가 큽니다. 자기 혼자 수준에서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찬양을 합니다. 자유롭기는 하지만 그만큼 걸리는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좀더 나아가 2대의 예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가 자녀와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부모님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이기도 하면서 아들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함께 한 하나님을 섬깁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다가 나중에는 부모님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2대의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는 3대의 예배를 생각해 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고 그 아래 아버지,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아들, 딸이 있습니다. 아니면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그리고 손자, 손녀입니다. 어떤 경우이든 손자 손녀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보게 됩니다. 3대면 각 세대의 나이를 합칠 때 거의100년부터 시작되는 신앙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서 각 세대가 단순히 이 세상에서 생물학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계시다는 것이 의미있는 것이 아닙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하나님을 믿고 아버지, 어머니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커다란 확신과 신뢰가 됩니다. 벌써 할아버지가 신앙을 검증했고 아버지가 신앙을 검증했기 때문에 그 자녀에게는 당연하게 물려줄 수 있는 신앙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한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유업을 공유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175세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기준으로 160세부터 175세까지는 야곱과 함께 3대가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3대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항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려졌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함께 하나님을 불렀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가 애굽에서 묻힐 때에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갈 것을 약속하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맹세하신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50:24). 또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3:6). 그리고 애굽에서 종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으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6:8). 이 모든 것을 볼 때 3대가 연합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 예배를 받으시며 그 약속을 지키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속에서 3대가 함께 예배드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모습은 그 가정이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들이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유업을 사모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 간구를 들으시고 그 약속을 이루어주십니다. 그러한 신앙은 잠깐 맛보기만을 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잠깐 경험해 보고나서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넘어가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 신앙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해서 그것을 확신하는 것이고 그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자녀에게 연결시켜주는 신앙입니다. 그 자녀도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이 있을 때에 그것을 자신의 자녀에게 또다시 연결시켜 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대에 걸친 신앙은 신앙과 삶을 연결하는 신앙이 됩니다. 또한 그러한 신앙은 믿는 대로 살아가는 신앙이 됩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신앙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대를 잇는 신앙을 기억하시고 붙드시며 도우십니다. 그런 가정에 하나님은 할아버지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의 하나님이요, 그 아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3대가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인생의 많은 고비과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붙들 것인지, 아니면 세상을 붙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생겨납니다. 왜 아브라함과 이삭과 에서의 하나님은 아니었을까요? 왜 아브라함과 이스마엘과 느바욧의 하나님은 아니었을까요? 아브라함에게 자식들이 많았지만 오직 이삭만이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또한 이삭에게 에서와 야곱이 있었지만 야곱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 것은 각각의 세대에서 당면하는 어려움 속에서 누구를 의지하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1대인 아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과연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의 고민 속에서 아담은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창세기 4:25절을 함께 읽어봅니다.

“[]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아담은 다시 아내와 동침하여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습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보상, compensation’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내게 다른 씨를 주셨음을 기뻐하며 감사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셋의 출생에는 가슴아픈 가족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가인(얻음, possesion)과 아벨(호흡, breath)을 주셨음을 기뻐하며 감사하였는데 그 가인이 아벨을 죽여서 아벨이 세상을 떠났고 그 다음에 가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가족과 함께 살수 없이 방랑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두 아들을 다 잃어버리고 아담과 하와는 슬픔에 잠길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 어느 부모에게 사랑하던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큰 아들이 작은 아들을 죽이고 집을 떠났다고 한다면 그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비통하고 비참하겠습니까? 그로 인해서 부모는 이혼을 하거나 자살을 하거나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했을 것입니다. 그 참담한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한 아들의 예배는 받으시고 다른 한 아들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기 때문임을 안다면, 그리고 살인을 저지른 아들에게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려서 결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오늘날 우리가 그런 경험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계속 믿고 따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가정들이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갑니다. 3대의 신앙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3대의 신앙을 이루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인생 속에서 축복과 평안함 만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1대가 잘해도 2대째 3대째 어려운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2,3대에서의 신앙적인 결단은 고사하고 1대에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경제적인 압박, 가정적인 갈등, 개인적인 고민등이 겹치다 보면 하나님은 자연히 놓아버리게 됩니다. 학생들은 학업과 시험준비에 바빠서 하나님을 등한시 합니다. 직장인들은 직업과 조직의 스트레스 때문에 하나님을 등집니다. 내신이, 수능이, 대학문화가, 군대가, 연애가, 결혼이, 직장이, 자녀가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의 내신이, 수능이, 대학문화가, 군대가, 연애가, 결혼이, 직장이, 그리고 그 자녀의 자녀가 우리의 발목을 다시 잡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뚫고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함께 부를 수 있겠습니까? 바로 아담이 했던 일이 그 모범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또한 의지하였습니다. 그러한 소망이 결국 내신은 실패하였지만 수능에 도우심을 받게 했습니다. 수능에 실패는 했지만 대학에 도우심을 받게 했습니다. 대학에 실패는 했지만 군대의 도우심을 받게 하였고, 군대에서는 실패했지만 다시 연애에서, 혹은 결혼에서 혹은 직장에서 도우심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많은 고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 한번의 실패로 끝장나는 삶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한번의 실패와 어려움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나머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평안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혹은 성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결국은 그러다 죽을 것이고 그렇게 죽으면 내세에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가 없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은 둘째 친다 하더라도 그의 살아 있을 때의 삶은 오직 몇년도에 태어나서 자녀를 낳고 살다가 몇년도에 죽은 사람에 불과합니다. 죽은 지 10년 내에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죽은지 100년이 넘어가 보십시오.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안에 있으면 다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그 사람이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1대가 하나님 안에 살아있고 2대가 하나님 안에 살아있으며 3대가 하나님 안에 살아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 안에 살아있으며, 아담과 셋과 그리고 에노스가 하나님 안에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다 만나보게 될 3대의 가정들입니다.

 

이 가정의 달에 함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꿈꾸어보시기를 축원합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자녀와 손자와 함께 예배드리는 삶을 바로 여러분의 삶속에서 소망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 할아버지 할머니일 것이고 아버지, 어머니일 것이고 아들과 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1대가 되거나 2대가 되거나 3대가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인생에서 겪게될 모든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영원한 도우심과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드리며 나아가는 귀한 가정들로 이루어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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