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0: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막]10: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막]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막]10: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막]10: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막]10: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올리고 들으심을 얻기를 간구하지만 그 가운데에는 하나님께서 들으시지 않는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경외한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들으시지 않는 소원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들으시지 않는 소원이란 무엇일까요? 그런 소원이
무엇인지를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35절을 같이 봅니다.
“[막]10: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막]10: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막]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무엇인가를 간구하였습니다. 그 간구의 내용은 자신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동일한 장면이 마태복음에도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마]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마]20: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렇지만
이 둘 사이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세베대의 아들들이 어머니의 요구에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도 동일하게 어머니의 요구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와 요한이 원하던 것을 어머니가 대표격으로 와서 예수님께 원했던 것이고 그 원하는 내용은
야고보와 요한이 원하던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와서 예수님께 원하는 것이나 아들들이 와서
예수님께 원하는 것이나 결론적으로 동일한 내용이 됩니다.결국 세베대의 아들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이 예수님의 2인자와 3인자가 되게 해달라는 요구를 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소원은 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이 원한
것을 얻지 못한 세 가지 이유가 나타납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이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소원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막]10: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이
구하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에게 좌편과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지만 예수님께
좌편과 우편에 앉는 것이란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좌편과 우편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좌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야고보와 요한은 왕좌에 오르게 되시면 거기에서 자신들을 좌편과 우편에
있게 해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좌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2인자나 3인자는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원했던 좌편과 우편은 십자가의 형틀에서의 자리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왕이
죽고난 다음에 열 번째 아들이었던 솔로몬이 왕이 되자 다윗의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는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를 찾아가서 다윗왕이 죽기전에 그를 섬기던
아비삭이라는 후처를 자신에게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밧세바는 솔로몬을 찾아가서 그 말을 전합니다. 그 말을 듣고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왕상]2:22 솔로몬 왕이 그의 어머니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그는 나의 형이오니 그를 위하여 왕권도 구하옵소서 그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을 위해서도
구하옵소서 하고
[왕상]2:23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의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이제 아도니야가
다윗왕을 섬기던 아비삭을 달라고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한 것입니까? 그것은 왕권을 달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물론 아도니야는 자기가 무엇을 원한 것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도 처음
교회를 시작했을 때 누군가 5천만원을 헌금한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뻐하면서 기다렸는데 막판에 마음이 바뀌어서 취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좌절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일까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때 그 돈을 안받기를 참 잘했습니다. 그
돈이 사실 순수하게 헌금하는 것이 아니어서(그래서 취소하기도 했지만),
이런 저런 요구사항이 많았습니다. 만약 그 돈을 받게 되었으면 꼼짝없이 허수아비처럼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차라리 안받는 것이 잘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러한 그런 것이 어떻게 자신에게 해가 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들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지금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해가 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지 않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물론 우리는 겪어보아야만 알게 됩니다. 겪어보지 않은 것은 얼마나 나쁜 것이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쪽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그들이 원한 것을 들어주시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 대신에 잔과 세례를 받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10:38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막]10: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이후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차피 그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것을 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그들이 할 수 없다고 했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더 원하신 대답은 ‘주님의 잔과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돌이키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모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는 것도 할 수 있다고 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자신들의 욕심에 눈이 멀어서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할 수 없는 것도 할 수 있다고 말해버렸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소원이 들어지지 않은 이유였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너무나 자신들의 욕심에 근거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그와 비슷한 경우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은 결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막]14: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막]14: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의
말속에서 헛된 자신감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다는 말은 자신의 한계를
무시한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버리지 않으려는 진심보다는 예수님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자신의 욕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가장 먼저 주님을 아주 구체적으로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욕심대로 구할 때 주지 않으십니다. 야고보서 4장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약]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였을 때 그것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일이거나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될 때에 그것은 정욕에 기초한 것이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하게 되고 그러한 정욕에 사로잡힌 기도를 주님은 들으시지 않습니다. 결국 야고보와 요한이 원했던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그들의 정욕으로 인한 기도였음이 드러나고 만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어느정도 진행하게 되었을 때 주변에서 무리를 해서라도 확장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한번은 용기를 내어서 무리하게 새로운 건물에 들어갔습니다. 엘리베이터도 있고 주차장도 있고 덕분에 관리비도 비싸고 월세도 비쌌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용감하게 입주를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교인들은 떠나고 월세가
감당이 안되서 결국은 몇달만에 그곳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무 소득도 없이 그 장소를 쫓겨나듯 떠나면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데 무리하게 하니까 기도가 응답이 안되는구나를 느꼈습니다.
일반적인
삶에서도 이러한 원리는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정욕으로 기도하면서 실현불가능한 헌신과 역부족인
충성을 맹세한다고 할 때에 사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정욕으로 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한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으로 하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그들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얻으려 하지 않고 받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얻으려 한다는 것과 받으려 한다는 것이 차이는 순리대로 얻는 것과 억지를 써가며 받으려는 것의 차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봅니다.
“[막]10: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주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좌우편은 십자가의 양쪽에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 임의로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행한 악행으로 인해서 얻게 되는 결과일뿐이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인해 일어나는 심판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죄인들이 자신의 죄로 인해서 얻는 것입니까? 심판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그들이 한 일은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일부러 억지로
주시는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이 행한 일의 결과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자취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야고보와 요한이 원한 자리는 주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었습니다. 행한 대로 받는 것이 바로 그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잘 말하면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의 미움과 비난을 무릎쓰고 예수님께 나아와서 다른 제자들은 제쳐놓고 자신들에게만 그 높은
자리를 달라고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자리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 자리는 자신의 수단과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고와 성실함으로 얻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어려서부터 놀라운 비전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비전의 꿈과는 정반대로
애굽의 노예로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음 속에 비전의 꿈을 잊지 않고 있었으나 있는 곳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아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원한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럴 때 그는 가는 곳마다 존귀함을 얻었고 하는
일마다 충성스러웠습니다. 결국 그는 전옥지기로 왕의 신하들을 잘 섬기면서 바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부르심을 받게 되었고 그 부르심도 잘 감당하면서 바로로부터 총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높아지려고 하지
않았으나 높아졌습니다.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지만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력도 없고 준비도 없고 노력도 없고 애씀도 없이 받기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얻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준비도 없이 그저 하나님께 간구만 한다고 해서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며 주님께 나아갈 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는 억지로 떼를 써서 받고자 하는 기도가 아니라 순리대로 얻고자 하는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우리는 두 번의 합병시도를 했고 모두다 실패했습니다. 그 이후로 내 사전에 앞으로 다시는 합병이란
없다고 결심했습니다. 매번 새로운 성도들을 받게 된다는 기대감에 시작하지만 결코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새로운 성도는 얻는 것이지 단순히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노력해서 얻어야지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그냥 오는 성도들은 순수한 목적으로 오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결국은 우리를 이용하고 우리를 무시하고 우리를 마음 아프게 하고서 떠나가고 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날마다 야고보와 요한처럼 어리석은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좌절해서 다시는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은 간구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올바르게만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얼마나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며
역사하시겠습니까?
나중에
이 야고보와 요한 중에서 요한은 다른 제자들보다도 가장 오래 살면서 마지막까지 요한계시록을 쓰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에 대해서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요한에 대한 놀라운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요]21: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요]21: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결국 야고보와
요한중에서 야고보는 일찍 순교를 당하였으나 요한은 제자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다 얻게 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그 뜻에 순종하며 얻고자
하는 자들이 되기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따르면서 주님 기뻐하시는 대로 간구하여 더욱
귀한 것을 얻게 되시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