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11:8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지로다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
[전]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 11:10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주를 열심히 살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그 일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일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열심히 사는 일이기도 합니다. 또는 자기 자신의 발전과
재능의 개발을 위해서 열심히 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살다가 가끔씩은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도 문제를 해결하는 경찰도
화재나 및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소방관도 자신만의 시간이 생겼을 때 편안한 마음으로 휴식을 취합니다. 그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누리는 일입니다. 부족한 잠을 자거나 하고 싶은 운동을 하거나 좋아하는
영화를 보거나 읽고 싶은 책을 읽거나 듣고 싶은 음악을 듣거나 보고 싶은 TV프로그램을 보는 것 등은
전부 휴식시간에 스트레스를 풀며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시간입니다. 그런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 전까지 해야할 일을 했고 중요한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중요하고 사명감이 있는 일을 하고 난 다음에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런 휴식 속에서 재충전이 되고 그 재충전 속에서 다음에 해야하는 일을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휴식시간 속에서 즐거움을 추구하려고 할 때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휴식을 취하는 그 시간 동안 어떤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는지에 대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살펴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관점과 시각 속에서 우리가
드러나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 앞에 놓이게 됩니다. 가장 자신의 개인적인 휴식 시간 속에서
무엇을 즐거워하였는가를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우리가 읽은 전도서의 말씀은 고단한 인생속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동안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즐거움의 시간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의 시간을 갖는 근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 11:8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지로다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
전도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나타나는 말이 ‘헛되도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헛되니 하나님 믿는 것도 헛되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을 따라 나아가고 세상의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것이
헛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 안에서 의미를 찾고 그 헛되고 무의미함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더욱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이 세상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비록 캄캄한 날도 많고 힘든 날도 많지만 즐거워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 입니다. 미래는 헛되고 캄캄하지만 영원은 소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 영원을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의 시간속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믿음장으로 알려져 있는 히브리서 11장은 우리에게 영원을 바라보면서
현재를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우리가
사는 보이는 모든 세계는 이미 나타난 것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그 모든 세계는 앞으로 나타날
것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도 하나님의 심판도 하나님의 영광도 앞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그 영원한 세계를 믿음으로 바라볼 때에만 비로소 현재의 삶이 의미가 있게 됩니다. 아벨은 바로
그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였으나 오히려 가인보다 의로운
자로서 온전한 제사를 드렸던 자가 되었습니다. 에녹은 심지어 죽음을 보지 않고 그대로 하나님 나라로
옮기워졌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벨이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현재의 삶속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세계를 바라볼 때
그렇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이 진정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에녹이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영원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였다는 것을 깨달으면 비로소 그가 어떻게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울 수 있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현재만 보면 스트레스가 되고 조금 더 멀리 미래만 보더라도 암담하고 캄캄해서 도저히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없지만 더 멀리 영원을 바라보면 그 속에서 비로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휴식을
할 수도 있고 필요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그속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속에서
그 여가시간의 의미가 구분됩니다. 우리가 그 즐거움의 시간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혼자 있으면서
자신만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할 때 이 즐거움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선한 즐거움입니다. 선한 즐거움은 선을 향하기 위한 준비가 됩니다. 두 번째는 중립적인
즐거움입니다. 이것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아무 방향으로 나아가지도 않게 하는 즐거움입니다. 세 번째는 악한 즐거움입니다. 이것은 즐거움을 통해서 더욱 악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혼자서 휴식을 취하고 스트레스를 풀고 나름의 여가생활을 하는데 이와 같은 세
가지의 의미가 생깁니다. 항상 건전하고 올바르게 휴식을 취한다면야 별다른 고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가생활을 하다 보면 그렇게 쉽게 결정되지 않습니다. 또는
나 혼자만의 여가생활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상황속에서 자신의 기호와 여가와 휴식의 시간은
선하거나 중립적이거나에서 그치지 않고 악한 즐거움을 선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우리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시간을 누리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고 그름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전]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이말은
단지 청년에게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때를 즐거워하며 자신의 날을 기뻐하여 마음의
원하는 길과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갖는 휴식시간과 자신이 누리는 편안한
시간을 즐거워하면서 마음이 닿는 대로 눈이 원하는 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휴식시간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모든 일로 인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겼는가를 하나님은 아십니다. 또한 우리가 사람들을 어떻게 섬겼는가도 역시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가도 아십니다. 그 모든 것이 선하고 의롭고 아름다울 때 하나님은 상주시고 칭찬하십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여가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도 아십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도 판단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휴식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며 우리가 선택하는 즐거움이 어떤 종류의
즐거움인가를 스스로 돌아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암몬 자손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전에 한번 전쟁에
참여했다가 죽을 뻔한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다윗은 직접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고 예루살렘 성에 있으면서 보고만 받았습니다.
“[삼하] 11:1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그때 그는
자기 만의 휴식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저녁 때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처음에는 하늘도 보고 공기도 쐬었지만 점차 아래 민가에서 보이는 일들에 관심을 갖고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삼하] 11:2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다윗은
휴식시간에 그가 할 수 있는 선한 것과 중립적인 것과 악한 것 중에서 악한 즐거움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에 외면하지 않고 더욱 더욱 가까이 다가가면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을 알았고 그녀를 만났으며 유부녀인 그녀와 관계를 맺었고 이후에 그녀의 남편을 죽였고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결국 이일로 인해서 혹독한 죄값을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전부 휴식시간을 어떻게 보내었는가로 인해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예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발견됩니다. 인기있고 유명한 연예인이 휴식시간에 하던 도박과 노름으로 인해서
하루 아침에 사라집니다. 역시 재능있고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던 연예인이 여자문제와 술문제로 하루
아침에 사라집니다. 역시 일잘하고 똑똑하며 성실하던 공무원이 혹은 기업인이 혹은 운동선수가 돈문제, 여자문제, 술문제 등등으로 법의 심판을 받고 지탄을 받으며 사라집니다. 신앙심이 좋고 신실하며 존경받던 신앙인도 이런 저런 문제들로 인해서 더이상 사역현장에 설 수 없게 되어서 사라집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성실히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꾸준히 스스로를 개발하고 있을 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휴식시간과 여가시간을 보낼 때 단지 스트레스만을 해소한
것이 아니라 더 큰 즐거움을 추구하여 악에 발을 딛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그 시간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 시간이 하나님 앞에서 펼쳐져야만 합니다. 그 시간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시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떳떳할 때 비로소 그 시간은 유익하고 생산적이며 충만한 시간이 되어서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달려나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전도서 말씀은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전] 11:10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걱정과
근심으로 그 시간을 보내지 말고 악으로 더 큰 즐거움을 채우려고 하지 말고 그것이 자신에게서 물러가게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만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던 그 때가 다 헛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창조주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는 나만의 시간이라고 단정지었던 그 시간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되고, 하나님이 나를 돌아보시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너무나
돌아보시는 시간이 되어집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바로 무엇을
하던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가생활을 하면서도 휴식을 취하면서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면서 그 시간을 충만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괴로워하면서 혹은 악을 취하면서 죄책감과 수치심에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그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모습으로 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이속에서 준비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간이 익숙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공유했습니다. 자기만
그렇게 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도록 권면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와 교제를
통해서 다른 성도들은 어떻게 사는 지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속에서 영향을 받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가치를 나누는 곳입니다. 그 속에서 성도들 나름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제가 청년부 시절 집회는 전부 토요일에 있었습니다.
토요일은 성경공부하고 찬양하고 교제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집에
가서 자고 다시 그 다음날 주일에 주일예배로 모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면 다시 시작되는
한주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져서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는 든든한 상태가 되곤 했습니다. 이제는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모든 영적인 사역들은 전부 주일에 집중되기 때문에 주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주말을
잘 보내야만 합니다. 그 주말에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느냐가 주일의 의미를 결정하고 더 나아가 한주간의
승리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휴식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는 다시 신앙생활을 어떻게 잘 할
수 있는가를 결정짓게 되는 것입니다. 디도데전서 3장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딤전]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교회는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알게 하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교회 속에 우리들은 온전한 경건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을 닮아서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자기만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지를 훈련받습니다. 그렇게 나아갈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함을 주시고 주님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선한 즐거움이며 그 즐거움을 바로 교회에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모두가
가장 혼자 있는 그 시간에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또한 함께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이 있음을 기억하고 악에 빠지지 않고 온전하여져서 다시 만나고 다시
교제하고 다시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날마다 이루어가는 귀한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