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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결심] 46고전 15; 29-34 부활이 있기 때문에 신앙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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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고전 15; 29-34 부활이있기 때문에 신앙으로 살아간다_1

 

 2016.4.17.. 주일오전.

 

*개요:  부활신앙의 삶, 7실천, 2분석,  

[고전]15: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고전]15: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날마다 죽노라

[고전]15: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전]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고전]15: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말하노라

 

 

얼마 전에 저는 탈무드가 성경적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있습니다. 당연히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근거자료를 좀더 찾아보았습니다. 확실히 탈무드가 얼마나 비성경적인가가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탈무드는기독교에서 말하는 5대 표어의 의미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5대 표어는 '오직 성경, 오직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5대표어가 있습니다. 성경적인가 하는 것은 성경에 나와있다고 해서 성경적이라는 말이 아니고 이러한 기독교의 5대 표어에 일치할 때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탈무드는 비성경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탈무드에서는 예수님을 말하기를 우상숭배자요, 마법사요, 사악하고, 예수님을믿는 자들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탈무드가 얼마나 거짓되게 포장되고 오해되었는지모릅니다. 또한 탈무드가 보는 세계는 오직 현세에만 있습니다. 부활을믿고 그 부활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활개념을 이 세상에서의 삶에 적용시켜서 이 세상에서 토라에 따라 윤리적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부활이라고말합니다.

탈무드는 결국 이 세상의 처세술일 뿐입니다. 기독교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일 뿐이었습니다. 지금도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기초하며 이 세상을 목표로 하며 살아가고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성경은 부활을 가르칩니다. 성경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전제로 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엄밀히말해서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생활은 이 세상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위하는것입니다. 고등학교 때의 학습이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위하는 것인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그것은 집안살림을 배우는 것이 부모님과 함께 살 때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 이후를 위하는 것과도같습니다. 또는 연수원에서 받는 교육이 현장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이생과 내세의 의미를 다 같는 것인데 다만 이생만을 위해서 한다고 말하고 내세를 생각하지않는다면 그 모든 것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달라질 지 상상해 보십시오. 난 대학안가 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고등학교 교육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난결혼 안해 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집안생활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난 회사 그만둘 거야 라고 말하기 시작하면연수원에서의 삶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끔찍할 것입니다. 오늘성경말씀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고전]15: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만약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왜 세례를 받겠습니까?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자체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29절의 해석에 대해서는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이 해석이 마치 성도들은 다른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처럼 이해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확한 해석은 이렇습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이되기)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그들(이 되기)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이러한 해석의 오해는 헬라어 'πρ τν νεκρν'에 있습니다. 전치사로 쓰인 'πρ'를 기계적으로 번역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의미는 영어로는 'in behalf of, for thesake of, over, beyond' 등입니다. '세례를 받는 자들' '죽은 자들'이 다른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임을 알지 못해서 혼동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 맥락에서 말하려는 것은 난데없이죽은 자들을 위한 신앙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번째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자들이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겠느냐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정말 신앙생활은 너무 무의미합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가 단지 교회의 정식교인이 되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이생에서의 의미만 있다면 얼마나무의미하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실 세례는 부활에 참여하여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실 것을 믿고 소망하는성도들의 준비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주를 따르고자 하면 누구나 다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하는 세례는 모두 이 세상에서만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으면 다 사라질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존재하기에 우리의 세례는 의미있습니다. 이생에서 그리고내세에서 세례는 우리의 신앙과 믿음의 동일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윤두용 장로님을 간호하면서 6인실 병실에 있었는데 그 병실은 전부 전립선 암환자들만 있었습니다. 다들전립선암 때문에 수술을 받고 또한 수술을 받기 위해서 입원을 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있던 분이 나가기도하고 새로운 분이 들어오기도 했는데 나이가 많이 드신 어떤 분이 수술을 받고 난 다음에 너무 아파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투리로 아프다는 것을 '징그러워,징그러워'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있었는데 새로운분이 입원을 하고 아까 그분과 옆자리라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습니다. 새로 오신 분이전립선암이라 수술을 해도 안좋아질 수 있다던데 걱정은 안하시냐고 물어보니까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안좋아진다 하더라도 결국은 천국에 갈건데 뭐가걱정이냐고 대답하셨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침대 옆에는 성경책이 딱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분의 신앙이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성찬을 하고 신앙생활을 해도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죽음앞에서 얼마나 초라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고 영생과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을 때 이생의 모든 것은 그저 풀의 꽃과 같을뿐입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속에서 삶의 모든 괴로움과 허무함을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삶속에서 이러한 부활을 소망하는 삶을고백했습니다. 30,31절입니다.

"[고전]15: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고전]15:31             형제들아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는 언제나 위협을 무릅쓴다고 했습니다. 또한 단언하건대 그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하루 하루가위협이고 한 시간 한 시간이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을 바라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위협과죽음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렇게 바울처럼 부활을 바라보며 위협을무릅쓰고 죽음을 감수하는 것이 별 것 아니게 보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그런 삶 보다는 부활을생각하거나 내세를 생각하지 말고 하루 하루의 삶에 충실하며 현재 있는 한 시간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더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바로탈무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삶은 아닙니다. 그것은윤리나 도덕이나 규범이나 좌우명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의지하고 믿는 믿음은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혼란스러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신앙은 내세를 생각하는것이지 내세가 없고 부활이 없다는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귀로 들을 수 있다면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감각일 뿐이요 이생에 집착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신앙입니다.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분을 믿는믿음입니다. 그러면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익숙해 지는 것입니다. 마치뱃속의 애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세상을 모르지만 지각을 가지고 익숙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부활 이후와연결될 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부활 후에 만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우리가 듣는설교말씀이 부활 후의 하나님을 알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이 부활 후에 하나님께 부를 새 노래를예비하게 합니다. 부활 후엔 핸드폰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컴퓨터도필요없을 것입니다. 책도 사라질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의관계 속에서 의미있는 것들만 남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다 변화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의 일들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마치 폭포 너머에 다리를 놓은 것과 같아서 폭포를 지나가는 데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연결되어서폭포 이후까지 연결시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생활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단지 이생만 생각하고 내세는생각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다리가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신앙생활도 무의미해지고 단지 사교활동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 [고전]15: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전]15:33             속지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만약 세상 사람들처럼 열심히 현세의 삶만 산다면 그것은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맹수와 더불어 싸운다 하더라도 그것은 현세로 국한될 뿐입니다. 그럴 때 삶은 더욱 더욱 허무해져서 사람들은 어차피 죽고 사라질 텐데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그렇게 죽더라도 그것에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 영원을 사모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사를 잘 보여주는 베스트셀러나 인기검색어의 목록을 보십시오. 이세상 사람들은 부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허무한 관심사에 속지말고 악한 사람들이 만드는 선한 행실에 대한 더럽힘을 간파해야 합니다. 그런 유행이나경향성에 흔들리지 않으면 속지 않는 것이지만 그런 관심사에 영향을 받고 흔들리고 얽매이게 되면 선한 행실을 전부 더럽히게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악하게 사는 것에 대한 자신감과 무덤덤함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만 부활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다시 살아날 것을 생각해보면 그래서는 안됩니다. 다같이 34절을 읽어봅니다.

"[고전]15: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위하여 말하노라"

부활을 이루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신앙 안에서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잊어버립니다.그러나 다시 깨어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이렇게 다시 깨어서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렇게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의를 행하지 않아도 된다든지 죄를 지어도 된다든지의 우리를 잠들게하는 삶이 아니라 다시 의를 행해야 하고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해야할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할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일깨울 때에 주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를 부끄럽게만드십니다. 우리는 부끄러워져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알게 된 것입니다.

부활이 다가옵니다. 죽음도다가오지만 그 후의 부활도 다가옵니다. 그 부활을 바라보며 신앙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행해야 하는 의를 행하였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 죄를 범하지는 않았는지를돌이켜보고 그것을 다시 준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앙생활의의미와 가치를 더욱 깨닫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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