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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양선] 64요삼 1; 9-12 하나님께 속한 자와 뵙지 못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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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요삼 1; 9-12 하나님께 속한 자와 뵙지 못하는 자_1

 

2017. 10. 1. . 주일오전.

 

*개요:  양선의 의미, 66양선, 53희생-66양선,

[요삼]1: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요삼]1:10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요삼]1: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요삼]1:12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과일 중의 왕자라는 별명을 가진 과일이 있습니다. 바로 두리안입니다. 이 두리안은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나옵니다. 태국이나 인도, 미얀마, 말레이시아를 여행하다 보면 쉽게 먹을 수 있습니다. 냄새는 고약한데 맛이 기가 막힙니다. 먹어본 사람은 두리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 과일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 맛과 냄새에 대해서는 오직 경험을 통해서 온전히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경험해 볼 때 그 맛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배우는 것만으로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가르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결국은 성령의 열매는 항상 나타나야만 하고 그렇게 나타날 때에 비로소 그 열매의 진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로 양선이라는 것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열매인 양선이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열심히 외우기는 하지만 정작 그 아홉 가지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는 알지만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커다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서 양선은 용어 자체로도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 전에 나오는 사랑, 희락, 화평, 인내, 긍휼등은 그 말 자체가 어렵게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양선은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되고 갸우뚱하게 되고 잘 모르겠다는 생각까지도 들게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리안이라는 과일도 우리에게 익숙했다면 쉽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어색한 것이고 양선도 우리가 그 덕목에 그만큼 익숙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성령의 열매만큼 모든 대인관계에서 필요한 덕목이 없습니다. 이 열매에 익숙해질 때에 비로소 우리는 그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양선이라는 열매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성경말씀에서 양선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삼]1: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양선의 의미는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goodness’이고 선함, 선량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양선의 한자어의 의미는 어질 양, 착할 선(良善)’입니다. 어질고 착한 마음이 바로 양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양선을 요한3서에서는 선을 행하는 자(Anyone who does what is good)’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마음이 바로 양선이고 그러한 양선은 성령의 열매였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요한3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다고 하였습니다. 양선을 이루는 근원은 바로 하나님께 있는 것이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반대로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보고자 해도 하나님을 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떠나시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양선이 성령의 열매라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설명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양선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고 그분에 속해 있을 때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시는 분이시고 또한 선을 행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 보면 그분을 닮을 수 밖에 없고 그럴 때 그 사람도 하나님을 닮아서 선을 행하게 됩니다.

시편23편에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러한 찬양은 주님이 선하시고 인자하시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 선하시고 인자하신 주님께 나타낸 반응을 통해 증거되고 있습니다. 말로만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은 단순한 설명일 뿐입니다. 하지만 정말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내가 그 선하신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는 것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 역사하심에 대한 성도의 반응 속에서 양선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선의 의미가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입니다. 먼저 나오는 디오드레베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삼]1: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요삼]1:10        그러므로 내가 가면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디오드레베가 한 일을 보십시오. 사도 요한은 이전에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주는 편지를 썼었는데 디오드레베는 그러한 편지를 쓴 사도 요한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더욱 설명하고 가르치고 권면하기 위해서 편지를 썼지만 그 편지의 내용에 대해서 디오드레베는 좋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이유는 바로 그가 으뜸되기를 좋아하는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려는 사도 요한을 스스로 거부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사도 요한은 디오드레베가 한 일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 행한 일을 잊지 않으리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과 그의 일행을 비방하였던 것 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않고 또한 그렇게 행하는 자를 금하면서 교회에서 내쫓는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잊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악행은 그 악행으로 인해서 피해를 당한 자들에 의해서 증거됩니다. 그 증거는 매우 구체적이고 너무나 실제적입니다. 왜냐하면 피해를 당한 자들의 경험 속에 바로 그러한 악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악인들은 선인들에게 악을 행합니다. 그래서 선인들이 자신들의 받은 모든 고통을 말하는 분은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 모든 증거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기 때문에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한 것은 사람에게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가장 후회스러운 결과를 얻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양선을 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양선을 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죄악을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신 대로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그 죄가 문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죄악이 찾아오게 되면 결국은 그 죄악에 의해서 다스려지게 됩니다. 죄악을 행하고 심판을 받게 된 이유는 결국 처음부터 선함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였지만 과거 자신이 했던 나쁜 일들이 들통나면서 취직이 취소되는 일을 겪었습니다. 또는 미인대회에 우승을 했지만 과거의 행적이 문제가 되면서 수상이 취소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좋은 공직에 나설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과거에 했던 어리석은 일이 발목을 잡아서 결국은 낙마하는 정치인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전부 처음에 과거에 오래 전에 선을 행하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생긴 어리석음의 결과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 속에 우리가 행한 일의 결과를 겪고 있습니다. 좀더 착하게 했더라면 좋았을 일들이 있습니다. 좀더 선한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좋았을 경험들이 있습니다. 사소한 상황들에서 우리들은 항상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선을 행하면 선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반대로 악을 행하면 악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서 선을 행한 모든 일의 결과에는 하나님의 복을 주심이 있습니다. 악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처음에는 좋아 보일 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악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선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선량함이 생기고 양선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항상 선으로 나아갈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선을 행한 사람의 예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좋은 예로 나타나는 사람이 12절에 나오는 데메드리오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삼]1:12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데메드리오가 정말 선한 사람이었는가는 굳이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가 무슨 일을 했고 어떻게 그 일을 했는지 몰라도 됩니다. 왜나하면 그의 주변에서 그에 대해서 확실하게 증거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리에 의해서도 그가 올바르고 선하다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봐도 그는 조금도 악하거나 틀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증언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과 및 함께 하는 자들까지도 데메드리오는 정말 선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참되다는 것을 이 글의 수신자인 가이오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증거를 생각해 볼 때 어떤 사람이 선하다는 것은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서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주변에 있는 뭇 사람들이 그의 선함을 말할 것입니다. 또한 참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도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서는 증거를 받았더라도 말씀의 기준에서는 그렇게 선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았다 하더라도 사도 요한과 같은 그를 잘 알고 겪어본 영적지도자들에 의해서 또 한번 평가가 됩니다. 데메드리오가 이와 같은 주변 사람들이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의 법도에 의해서나 의롭게 인정받은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 속하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을 때에 그 속에서 선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다면 그 속에서 악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서로 대립적입니다. 선함을 발견하게 되거나 혹은 악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선하게 하려고 하거나 혹은 악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 둘은 서로 배타적입니다. 선하게 하려고 하면서 악하게 할 수 없습니다. 혹은 악하게 하려고 하면서 선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선하게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반대로 악한 것은 하나님을 뵙지 못하고 아무런 선한 증거나 선한 증언이 없는 자기 나름대로 만들어 가는 삶에 불과합니다. 선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항상 악하게 하지 않으려는 간절한 노력 속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려는 치열한 갈등 속에서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일입니다.

 

얼마 전에 뉴질랜드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 목사님이 잠시 귀국을 했습니다. 귀국을 한 김에 함께 만나서 뉴질랜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뉴질랜드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주권을 받아야 하는데 일단 영주권을 받게 되면 복지혜택이 엄청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한국사람들이 그 영주권을 따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주권을 따기 위해서는 중요한 기준이 있는데 그것이 영어입니다. 뉴질랜드 정부에서는 아무나 영주권을 따지 못하도록 엄격한 기준을 두고 그 기준에 합당한 사람에게만 영주권을 준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직장에서 일정액 이상의 급료를 받아야 하고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이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는데 제일 어려운 것이 바로 영어를 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어공부를 하지 않으면 그 영어 기준을 통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뉴질랜드에 와서 좋은 자연환경을 누리면서 매일 놀러 다닙니다. 그렇게 놀러 다니다 보면 공부할 시간을 갖지 못하니까 결국에는 영주권 신청이 불합격이 되어 버립니다. 불합격이 되면 뉴질랜드에 살기가 어려워져서 결국에는 다시 자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열심히 공부를 해서 마침내 영주권을 취득하게 됩니다. 그럴 때 그와 그의 가족은 뉴질랜드 정부가 제공하는 놀라운 복지혜택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 속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에 속해서 그 선함을 배우다 보면 그 선함이 뭇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진리의 말씀에도 일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속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자연히 악을 배우게 되고 그 악을 실천하면서 점차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그는 하나님 안에 속할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속해있는 악에 들어가게 되고 그 악 속에서 모든 악이 처하게 되면 영원한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주어진 시간이 있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놀러 다닐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해야 합니다. 믿으면 끝이 아닙니다.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믿음을 행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결국 그 믿음도 거짓 믿음이 되고 맙니다. 아담과 하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까? 그들은 순종하지 않아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사탄과 귀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심판받을 존재가 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순종의 영이고 악의 존재들이라서 악을 행하고자 하면서 심판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선과 악의 기로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주님은 말씀해 주십니다.

“[요삼]1: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단순한 사도 요한의 말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럴 때 양선하게 되고 선한 행동으로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열매를 자신이 누리고 주변 사람들이 누리고 하나님이 증거하십니다.

바로 지금의 삶 속에 양선이 흘러 넘쳐서 가장 달콤하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빛나는 귀한 성령의 열매가 여러분의 삶 속에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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