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3: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출]3: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출]3: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출]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성경에 나오는 구원은 인간이 원해서 얻기를 바라는 구원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이루어지는 구원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구원이든 하나님 만이 그 구원의 열매를 얻게 되는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구원이 필요없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면 그 구원은 인간에게 필요한 구원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바로의 학정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바로의 손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에게 전적으로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구원을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아서 그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도 커다란 영광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 대한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이었고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는 너무나 좋은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계획을 모세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출]3: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출]3: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내 백성의 고통을 보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건져내고 가나안으로 데려가려 하노라’ 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가시떨기나무가 불타고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 장면을 보고 신기하게 여겨 가까이 나아갔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것은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알아서 다 하신다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었지만 진짜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출]3: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출]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난데없이 모세에게 바로 그 일을 하도록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은 모세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에게서 빼내어 구원하신다는 것은 좋은 말씀이었지만 그 일을 자기를 통해서 하신다는 것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구원을 하실려면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면 되지 왜 나를 끌어들이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구원으로의 부르심에 강력히 거부하였습니다. 그의 최종적인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출]4: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모세는 하나님의 자신을 통한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계획이 전혀 좋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증거를 주시고 방법을 알려주셔도 그 모든 것이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는 그 당시 유목민인 미디안 사람들과 함께 거하면서 아내 십보라와 결혼을 하였고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평안하였고 한적하였으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서 바로를 만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보내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이미 애굽에서 살인죄를 짓고 도망쳐나온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었을지 모르지만 모세 자신에게는 고통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사용된다는 자체가 고통이자 괴로움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렇게 우리에게 고통과 괴로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 구원의 대상이 우리에게 고통이 됩니다. 그 구원의 방법이 우리에게 고통이 됩니다. 그 구원의 목적과 방향이 우리에게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구원의 여러 가지 의미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치 않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내가 원치 않는 방법으로 구원하고 내가 원지 않는 목적과 방향으로 구원이 이루어질 때 우리자신의 마음의 상태는 커다란 괴로움이 되어 버립니다.
과연 그럴 때 우리는 어떠한 모습을 가져야 할까요?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는 괴로움이 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유일한 해결방법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일을 행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뜻과 계획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이일에 대한 우리 자신의 거부와 반항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일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이루기를 원하시는가를 깨닫는 것만이 모든 거부의 반응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로를 생각하며 십보라를 생각하며 그외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생각하면서 가졌던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했던 그의 마음이 다음의 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그 말씀은 4장 15절 말씀이었습니다.
“[출]4: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하나님은 모세가 아론과 함께 가도록 하시면서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모세와 함께 하시고 아론과 함께 하셔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다 알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직접 내려가서 그들을 건져내리라고 하신 출애굽기 3장 8절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시는 것이었기 때문에 모세와 아론과 함께 하시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이끌려서 구원의 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 모세는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세의 선택과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조건 따라야 하는 강권적이고 권능의 부르심임을 알았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이일에 대해서 계속 거부하는 모세에게 노하기까지 하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노하게 했다가 어떤 처벌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확실하고 분명하고 거역할 수 없는 운명적인 부르심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구원으로의 부르심이 이렇게 운명적이고 강권적입니다. 때로 그 구원에 대한 부르심을 거역할 수 없고 도망갈 수 없는 구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짝 붙어서 할일을 알려주시고 갈길을 알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그 구원은 중요하며 핵심적이고 놀라운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 속에 있습니다.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르심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있는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구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 구원은 압도적이고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최우선적인 부르심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우리의 그 어떤 것들 보다 바로 이것이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양을 치고 그 양을 늘리며 그로 인해서 부자가 되는 것보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 중요하였습니다. 모세가 유유자적하게 광야에서 사는 것보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중요했습니다. 그 계획으로 나아갈 때만이 그가 사는 의미와 그가 존재하는 목적이 가치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강물에서 건져 내어져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자신이 받은 구원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일을 할 때 그 값어치가 나타났습니다. 그 가치를 나타내고자 할 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셔서 말씀하시는 분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말씀하여 주십니다.
모세가 보았던 가시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은 바로 그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시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그 불은 소멸하는 불이 아니었습니다. 그 불은 구원하는 불이었습니다. 빛을 비춰주는 불이었습니다. 그 불이 나중에 불기둥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지켜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 불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삶 속에 함께 하심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건져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와 이 민족과 이 사회에 하나님께서는 건져내실 자들을 건져내십니다. 그 구원에 동참하고 순종하여 이 시대의 새로운 출애굽을 이루며 하나님과 연합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속에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충만하심을 온전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우리 삶 속에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