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한 해의 반이 지났습니다. 남은 반년 동안 열심히 씨를 뿌려서 연말에 더욱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7월에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자 하는 주제는 ‘창세기에 나타난 예수님의 소원’입니다. 2020년 하반기의 표어는 ‘아버지를 통해 아들의 소원을 아는 성도가 되자’입니다. 구약의 창세기부터 신명기 속에 아들의 소원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 속에서 우리는 아들 예수님의 소원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과 죄사함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가장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서부터 맨 마지막인 계시록에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가르침을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구원의 의미를 삶 속에 잘 적용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서 나타날 때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언제나 구원은 근본적으로 문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없다면 구원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많다면 구원을 간절하게 바라게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분명하게 의식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해본 적이 없다 할지라도 최소한 이대로 살아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게 된 이유는 애초에 하나님 안에서 창조되었지만 범죄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세상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죽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애초부터 세상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원래 죽는 존재가 아니라 처음에는 죽지 않는 존재였다가 죽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과 언젠가 죽게 된다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은 이 모든 것을 부정하기에 사는 것이나 죽는 것 모두가 별다른 문제가 아니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문제로 여겨졌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원이 필요했습니다. 그 구원의 필요성의 시작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이 때부터 인간에게는 문제가 생겼고 그리고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분명히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고 먹으면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아내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아내의 말을 믿었고 먹으면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시작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것,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을 때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서 아담과 아내에게 충만한 결실을 줄 수 있었지만 아담과 아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 세상은 커다란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저주로 인해서 아담은 평생에 수고해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절로 과실이 맺히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고 수고해야만 비로소 과실이 맺히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고통과 괴로움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렇게 땅이 저주를 받아서 아담이 수고해야 소산을 먹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 말씀을 믿지 못했던 선택의 댓가였습니다. 그들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 정말 심각한 죄를 저질러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참한 심판의 결과 속에서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죄의 문제 속에서 그들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생겨났습니다.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고 밭의 채소를 먹게 되며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게 된 것은 비참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흙에서 취함을 입은 대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 흙에서 나온 자로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고 싶었지만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모든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그 때 아담은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습니다.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가죽옷이 필요 없었지만 세상에 나갈 때에는 가죽옷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는 이름이 필요 없었지만 세상에 나갈 때에는 특별한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버려지는 자들이 아니라 벌을 받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가죽옷을 입히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을 버리시고 잊어버리시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시고 주목하셨습니다. 자신들이 지은 죄로 인해서 심판을 받는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그들은 더욱 특별한 자가 되었습니다. 아담은 흙으로 돌아갈 자(아다마)가 되었고 아내는 하와(생명)가 되었습니다. 물론 심판이었기 때문에 이전 상태보다 더 떨어진 자들이 되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잘 감당할 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 가능성이 바로 구원이었습니다. 심각한 문제 속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십시오. 그렇게 시작된 인생살이에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 주어졌습니다. 그 구원은 죽음을 피하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서 인간에게는 감당해야하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습니다. 그것은 땀을 흘려야 소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육체는 죽어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생에 구원의 기회가 있어 그리스도를 믿고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가죽옷이 되신 그리스도입니다.
가죽옷을 만들어 주셨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던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깨달을 때에 우리 인생의 구원의 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잃고 그 몸의 가죽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던 한 희생제물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 단지 매정해보이는 에덴동산에서 내치시며 가혹하게 땀을 흘려야 소산을 얻게 하실 뿐만 아니라 허무하게 땅으로 돌아가라 하신 하나님의 처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가죽옷에 담긴 사랑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창세기를 통해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불신앙의 죄악과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입니다. 그것을 믿고 신뢰하고 붙들고 살아간다면 몸은 죽어도 영혼은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셨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처벌을 다 감수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바랄 때 비로소 예전처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께서 베푸신 예수님의 구원의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믿기에 천국도 믿고 구원도 믿을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소설에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천국에서 쫓겨난 천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하일 천사는 자신의 심판을 감당하며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다시 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오래 전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내어 보내시며 가죽옷을 지어 주셨듯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인간으로 받는 모든 심판을 잘 감당하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랄 때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바래야 하는 유일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방법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 방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옷을 입을 때에 하나님이 세우신 그룹들과 불 칼로 막혀서 갈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 그리스도와 함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방법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따르기를 바라시는 구원의 방법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방법을 잊지 말고 에덴동산에서 떨어진 자들로서 다시 하나님 앞에 서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사모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그렇게 되기를 가장 바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과 힘주심이 넘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