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계획] 43요 20; 26-31 믿는 자가 되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Loading the player...
43요 20; 26-31 믿는 자가 되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_1
2020. 2. 23. 주. 주일오전.
*개요: 아들의 소원, 51계획, 2관점, 5복음서, [요]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한 달 동안 우리는 아들의 소원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원하시는 것을 이루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인 결과를 낳게 하는지를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럴 때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원하시는 것을 이룰 때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가장 중요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그 뜻을 따랐고 그럴 때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 순종을 통해서 우리와 예수님 사이의 중요한 관계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거래가 아닙니다. 또한 어떤 규칙도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관계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관계를 제안하신 것입니다. 그의 뜻을 따르는 자가 될 때 우리는 그분의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 것이고 성도인 것이며 그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뜻을 따르며 그분이 원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의 중요한 관계에 이러한 원리를 적용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부부가 결혼해서 함께 생활할 때 서로의 뜻을 들어주는 것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유익이 있거나 혹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 배우자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는 배우자에게 몸과 마음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에 배우자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배우자의 원하는 것을 따르면서 두 사람은 더욱 하나가 되고 연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원하는 것을 따를 때 성도는 예수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성도의 삶을 구원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이 예수님과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자에게는 너무 쉽고 분명하며 중요한 일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렵고 불확실한 일입니다. 자전거를 타는 것이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려운 것처럼, 또한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이 운전 잘하는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려운 것처럼,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믿음이 없다가 믿음이 있게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이 한 가지를 하면 됩니다. 그것이 오늘 말씀에 나옵니다. 26, 27절입니다. “[요]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것은 이전과 같이 문들이 닫혔는데도 들어오신 것이었습니다. 문을 열어드려야만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문이 닫혀 있어도 예수님은 들어오실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특별한 부활체의 몸을 가지셨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특별히 도마를 부르셔서 도마에게 손가락을 내밀어서 자신의 손을 만져보고 손을 내밀어서 자신의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믿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고 나를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도마에게 하신 이유는 이전에 도마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요]20: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요]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는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 도마는 자신의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자신의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강한 불신을 했습니다. 또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정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인가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은 정말 그분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의심 많은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에게 해주신 말은 네 손가락을 내 손에 넣어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원하신 것은 확실합니다. 그가 믿음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원하심은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자기 손가락과 자기 손으로 예수님의 몸을 확인해봐야 믿겠다는 말은 결국 믿음 없는 자의 말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믿음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의 여부에 따라서 믿음 없는 자의 모습이 있고 믿음 있는 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도마는 믿음 없는 자였습니다. 그럴 때 자기 손가락을 예수님의 손에 넣어보고 자기 손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보고자 했습니다. 그러한 기준을 요구한 것은 예수님의 고난의 상처를 확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할 때 그 자신의 기준에 합당할 때에만 믿겠다는 자신의 원함이 피력되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도 역시 입장이 동일합니다. 세상에 화평이 있어야 믿겠고 어려울 때 도움이 나타나야 믿겠고 자기 뜻이 실현되어야 믿겠고 이래야 믿겠고 저래야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모든 기준과 주장은 전부 믿음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 3년간 같이 있었던 도마도 그러한 생각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아무리 지난 세월이 있었어도 단지 믿음 없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분이 아니라 사망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현재의 존재가 아니라 과거의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있으신 분이 아니라 능력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럴 때 그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믿음이 없는 자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고민 때문에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마의 변화를 눈 여겨 봐야 합니다. 자신의 기준에 집착하던 도마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됩니다.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 일을 도마가 이루고 있습니다.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도마는 자기 손가락을 예수님의 손에 넣어보고 자기 손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보아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즉시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정말 그가 자신의 기준인 손과 옆구리의 상처에 집착했다면 그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 맞네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혹은 지금 자신이 보는 예수님이 이전에 십자가에 죽으셨던 그 예수님이 맞네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 대답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도마는 자신의 기준의 중요성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도마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믿음 없는 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네가 믿음 있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씀에 예수님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깨달았습니다. 늘 자기를 불러 주시는 이전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되었을 때 예수님과의 관계를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원하시는 그 예수님의 원함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원하는 대상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믿음의 고백이 나왔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의 고백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것이지 예수님이 자신의 기준을 만족시켜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사랑받는 자였고 그 사랑받는 자임을 예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복된 사람들이 있음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보다 더 복된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주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더욱 주님의 사랑의 부르심의 의미를 깨닫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 사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신의 기준만 포기하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면 그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시며 영생을 얻게 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원하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불신을 버리고 의심을 내려놓고 자기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원하심을 따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 예수님을 따라갈 때 비로소 그는 예수님의 사람이 됩니다. 만약 자기 기준을 주장하고 그 기준을 요구한다면 그는 예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부정하고 부르심을 거부하는 믿음 없는 자에 불과합니다. 그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원함을 따르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온전한 성도가 됩니다. 그러한 성도가 되도록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렇게 부르시는 부르심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 성경말씀은 바로 그 부르심을 전하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이미 기록되었으니 다시 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보여주었으니 그 보여준 계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기록된 것을 누구든지 믿고 따를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이심을 믿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기록은 과거에 이루어졌으나 생명은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의 분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도 이 말씀 속에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것을 행함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 얻게 하심을 믿고 나의 원이 아닌 예수님의 원을 따라서 더욱 믿음 있는 자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사랑을 알게 하시고 생명을 얻게 하시며 영생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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