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학교] 19시 119; 67-71 배움을 통해서 어리석음에 대한 용서를 받음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크게보기]
19시 119; 67-71 배움을 통해서 어리석음에 대한 용서를 받음_1
2019. 11. 10. 주. 주일오전.
*개요: 학교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 14학교-54용서, 3분석 [시]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시]119:69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시]119:70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학교 영역에서 배우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라는 이해는 우리가 그런 용서가 없던 삶에서 용서를 받는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혜나 지식이 없던 삶에서 지혜와 지식을 갖게 되는 삶으로 나아가듯이 용서는 이전에 없던 놀라운 것을 받게 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모든 배움의 장소에서 우리는 용서의 은혜를 생각할 수 있고 또한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용서받는 자의 기쁨과 감사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의 의미는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이전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용서 받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지혜와 지식이 없어서 그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했다가 용서를 통해서 어려움을 해결하고 앞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갖게 되는 삶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혜와 지식이 없어서 얻게 된 고난과 괴로움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죄이자 허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긴 많은 어리석음과 괴로움을 생각해 보면 이후에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삶은 놀라운 변화의 삶이자 놀라운 용서의 삶입니다. 이전의 죄와 허물이 용서되고 새롭게 변화되고 발전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학업에 필요한 기초적인 지식을 알지 못해서 어려움을 당하다가 비로소 그 지식을 배우게 되면 그제서야 비로소 지난 날의 어리석음이 용서되고 새로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업무에 필요한 지혜를 알지 못해서 선후배나 동료들에게 괴로움을 받다가 비로소 그 지혜를 알게 되면 그제서야 비로소 용납이 되고 인정이 되는 것을 봅니다. 바로 그것이 용서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없었을 때에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 지혜를 얻게 되면 비로소 문제를 해결되어서 없어진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그러한 용서를 받고 살아갑니다. 다윗도 자신의 삶 속에서 바로 이러한 원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67절을 함께 봅니다. "[시]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그는 처음에는 주의 말씀을 알지 못해서 그릇 행했지만 그로 인해서 고난을 받은 다음에 주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는 더욱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라고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더 많은 용서의 은혜를 알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블레셋에게 빼았겼다가 다시 돌아온 하나님의 궤를 아비나답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옮겨가려고 큰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3만명의 백성들과 자기 수하의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온갖 악기와 찬양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법궤를 옮기는데 정작 그 법궤를 사람이 메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무지함 때문에 법궤를 수레에 싣고 소가 끌게 했고 결국에는 소가 뛰었을 때 웃사가 그 법궤를 손을 붙잡다가 웃사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윗의 무지함으로 인해서 사람이 한 명 죽은 것입니다. 이일로 인해서 다윗은 크게 상심하고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것을 포기하고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그러나 석 달이 흐른 후에 다윗이 다시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기로 했고 이번에는 율법에 기록된 대로 그 법궤에 채를 꿰어서 사람이 이동하게 하였습니다. 그럴 때에는 안전하게 잘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습니다. 모르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로 인한 고통을 겪은 다음에 지식을 아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은 자신의 삶에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배우기 전에는 고난을 당했고 어리석음을 당했고 억울함을 당했지만 배우고 난 다음에 비로소 그 배움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교통법규를 몰라서 많은 실수를 저지르다가 법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그 다음부터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는 생활규칙을 알지 못하고 이런 저런 잘못을 저지르다가 다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경우가 전부 배우기 전과 배운 다음에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상황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배우는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다른 자신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전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 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는 것은 그 어떤 지혜나 지식보다 가장 우월하고 가장 귀중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이생과 내생에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용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과정이 됩니다. 하나님께 배우고 하나님으로 인해 지혜를 깨닫게 되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다윗의 고백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깨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깨달음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구별됨을 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시]119:69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시]119:70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교만한 자들은 다윗을 공격하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들 속에서 그들과는 달리 주의 법도를 지킵니다. 주님께 배운 것들이 효과를 나타내며 실제로 구현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고 그렇게 되도록 다윗을 가르쳐 주고자 하지만 다윗은 그것을 거부하고 주의 법을 즐거워하고 주의 법을 배우고 지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안에서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자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삼상]26: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삼상]26: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아비새는 가장 일반적이고 세상적인 관점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원수를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다윗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관점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런 원수는 초기에 제압해야 하고 나중에라도 반드시 정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생각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배우는 자들입니다. 하나의 경험으로 배우는 자들이 아니라 그 경험 속에서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음으로 배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 뜻을 실현하는 자들이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세상 사람들의 죄악에 가담하지 않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든지 지혜나 지식 그 자체만 중립적으로 가르쳐주기만 하는 데는 없습니다. 그와 함께 세상적인 지혜도 가르쳐 주고 악한 행실도 같이 가르쳐 줍니다. 학교를 가서 배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것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것도 함께 배우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이유로 아예 모든 것을 배우지 말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라면 우리는 산 속에서 들어가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더욱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먼저 가르쳐 주십니다.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할 때 주님의 학교에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모든 배움과 학습 속에서 기억해야 할 내용입니다. 그 속에서 뱀 같이 지혜롭되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지혜를 얻되 그 지혜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있어서는 순결함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이러한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배울 때에는 이러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혜나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이룰 수 있는가를 배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형성됩니다.
세상에서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비슷하게 배우고 있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함께 상대하는 경쟁자들이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자들이 있습니다. 이제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서 지혜와 지식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있던 수많은 과학자들의 업적은 과학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더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더 큰 승리를 얻게 하려는 모든 지혜와 지식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큰 정치적인 야욕과 악한 목표를 채우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에 동참하느냐 아니면 동참하지 않느냐가 각 개인의 양심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대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혜와 지식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배움과 깨달음에 대한 모든 용서하심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유익을 얻지 못하는 것이 감사한 일이고 악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더 큰 명성을 얻지 못하는 것이 차라리 나은 일이고 오직 주어진 형편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행하며 사는 것이 인생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배우는 가장 좋은 지혜입니다. 이러한 지혜가 없다면 우리는 아직도 정말 중요한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용서받으며 살아가는 법입니다. 그것을 배울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 모든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이 세상에서 지혜와 지식이 없어서 고난을 받았을 때 비로소 지혜와 지식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것을 배울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감사하고 유익한 일입니다. 또한 단순한 지혜와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올바른 지혜와 지식을 배울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또한 이 세상에서 가지고 태어났던 어리석음이 사라지고 용서의 은혜를 알게 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혜롭게 성장하게 되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날마다 이러한 가르쳐 주심과 배워 나감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심을 얻을 때에 우리의 삶은 길던 짧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커다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여행을 목적으로 제주도를 간다고 해보십시오. 우리나라에서 출발하는 곳이 어디든지 짧게 걸리든지 길게 걸리든지 비행기를 타고 가든지 배를 타고 가든지 제주도는 즐거움과 기쁨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가 된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고 보람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로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 배우게 하심을 잘 배워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들의 형상으로 변하여진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배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지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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