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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인정] 43요 1; 17-22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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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17-22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_1

  

 

  

2021. 10. 24. . 주일오전.

  

 

  

*개요: 요한복음에서의 믿음의 소원, 교회/조직, 복음서, 인정-동행, 분석적해석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1: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1: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빛과 같아서 어둠을 비춰주는 역할을 합니다. 어두웠을 때에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잘 모르지만 빛이 비춰지면 그 빛을 통해서 어떤 모습이었는지가 나타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면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어두운 모습이 무엇인지가 드러나고 그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빛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다시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갈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연히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해도 또한 다시 어둠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빛을 비추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계속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 그렇게 빛으로 나아갈 기회를 가지고 있다가 마지막에 한 번 빛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 모두가 다 그렇게 빛으로 나아가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오기 전에 이미 그런 기회를 가졌을 수도 있고 혹은 우리 교회에 다니면서 그런 기회를 가질 수도 있고 아니면 앞으로 다른 교회를 다니면서도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보면 늘 중요한 것은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 빛에 나오든 말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빛을 비추려고 할 때 기쁨과 충만이 있습니다.

  

바다에 비추어지는 빛은 바다 속을 통과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빛의 이름은 등대이기 때문입니다. 바다를 밝히는 데에는 한참 부족한 것 같아도 그렇게 빛을 비추고 있기 때문에 배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이해는 사람을 설득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경고하는 것 뿐입니다. 그 경고를 무시했다면 그 결과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고 그 경고를 따랐다면 그 혜택을 누리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은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 대목은 바로 22절 말씀입니다.

  

“[]1: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 말씀은 세례 요한에게 사람들이 물었던 질문이지만 성경의 빛을 통해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주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었던 세례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었던 것처럼 사람들도 우리가 도대체 누구인지를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의 빛으로 우리 자신을 비춰 보아야 합니다. 나는 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질문한 이유는 그의 모습이 애매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라기에 나오는 메시야(그리스도) 같았지만 메시야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역시 말라기의 예언에 나오는 엘리야의 현현인가라고 물었지만 그렇지도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냐라고 물었을 때 그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18장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라고 했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다림이 되었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도 역시 아니라고 했습니다.

  

“[]1: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1: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세례 요한은 이렇게 자신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온전히 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개하고자 하는 그분이 누구인가를 더욱 설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정체가 분명해 졌습니다. 그는 그렇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1:23절에서 세례 요한은 스스로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1: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이렇게 말하면서 그의 정체성은 분명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메시야도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선지자도 아니었지만 그는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였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정체성은 너무나 분명하고 구체적이었습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전도를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찬양을 많이 부르고 성경을 많이 읽고 쓰고 외운다고 해서 우리의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라면 이단을 이겨낼 수 없을 것입니다. 타종교에 상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나 공로나 실적이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짓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인정받는가가 우리의 본질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입니다. 그분을 우러러 보면서 따라가고  있는지 아니면 그분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분과의 관계가 바로 우리 자신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꿩 잡는 것이 매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꿩을 잡아야 매인 것이고 매는 역시 꿩을 잡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별 볼일 없이 있는 것 같아도 정말 중요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할 때 그것이 진짜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못하고 있으면 그 전에 하는 사소한 일들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건물을 지키는 관리인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사소한 일인 것 같아도 관리인이 있으면 도둑이나 악인이 쉽게 침범을 못합니다. 가장 중요할 때 사람이 있기 때문에 제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지키는 사람일 때 비로소 의미가 있습니다. 정말 중요할 때 그리스도의 편이 될 때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성도로 만듭니다. 교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할 때 교회를 공격하는 사람이 교인이고 목회자를 괴롭히는 사람이 교인이며 자기가 원할 때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교인입니다. 성도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17, 18절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대답입니다.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리스도를 단순히 위인이나 성인이나 좋은 분으로 보는 것이 아닌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으로 볼 때 비로소 우리는 성도가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위치가 결정됩니다. 왜 교회를 공격하지 않고 왜 목회자를 괴롭히지 않고 왜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까? 교인으로는 그럴 수 있지만 성도로서는 그럴 수 없는 것이 성도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성자 하나님 앞에서 차마 그런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질을 결정합니다. 성도는 이와 같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있고 주님과 함께 하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두 번 다시 못 볼 일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성도들입니다.

  

 

  

지금도 그 독생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삶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은 인생을 살피시며 은혜와 진리를 주고 계십니다. 그것을 받으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의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교인이 되지 말고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에 있는 자들로 우리의 본질이 격하되지 않고 성도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정체성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이곳에서 목회를 하는 저나 함께 교회생활을 하는 여러분에게나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등대와 같은 자들이고 관리자와 같은 자들이며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성경말씀이 보여주는 온전한 깨달음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을 잘 섬기며 그의 길을 예비하고 지키며 따라가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성

  

1. 요한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돌아볼 수 있다.

  

2. 세례 요한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였다.

  

3.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대답은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4. 성도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오셔서 자신을 부르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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