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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사랑] 22아 2; 1-5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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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1-5 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삶_1

  

 

  

2021. 5. 23. . 주일오전.

  

 

  

*개요: 아가서에서의 믿음의 소원, 42편안->55동행, 5관점적해석, 3시가서 

  

 

  

[]2:1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2: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2:4    그가 나를 인도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2: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라 내가 사랑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아가서에서 우리가 보는 사랑은 나님과 성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 속에서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과 나님께 대한 성도의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나님의 성도들입니다.

  

이번에 아가서에 대한 소감을 들어보았더니 이를 통해서 나님의 마음이 느껴진다는 한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언제 느끼는가 면 키우는 개를 볼 때 그런 마음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어여쁘고 어여쁘다면서 개를 쓰다듬으면 개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듭니다. 그 주인의 사랑에 화답는 개가 그렇게 예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한 예일 뿐입니다. 개를 바라보며 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자녀를 바라보며 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고 배우자를 바라보며 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으며 부모를 바라보며 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그 대상과 그 삶속에서 나님의 사랑은 풍성게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깨달아 지면 그것은 그 사랑이 우리 삶 속에 퍼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체의 삶이 나님의 사랑으로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나님과의 신앙의 관계를 사랑으로 생각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나님과의 관계를 믿음으로 생각한다 더라도 역시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나님이 나를 믿어주시고 내가 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의 관계가 우리의 삶을 전부 믿음으로 만듭니다. 자신의 가족을 믿고 자신의 친구를 믿고 자신과 관계 있는 많은 사람들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 삶을 구성합니다. 단순히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고 축복이 있고 심판이 있는 것을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생각이 우리의 삶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불신과 미움이 있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을 구성합니다. 그러한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 될지는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으로 연결되고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도 그렇게 믿음으로 구성되고 사랑으로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마음과 사랑의 표현을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2:1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1절은 술람미 여인의 말이고 2절은 솔로몬 왕의 말입니다. 이 말을 성도의 고백과 나님의 사랑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자신을 나님의 사론의 수선화이자 골짜기의 백합화로 생각는 것입니다. ‘사론이란 갈멜산 남쪽의 비옥한 목초지역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론의 수선화는 들판에 핀 예쁜 꽃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자신을 들판에 핀 예쁜 꽃이라고 자각는 것은 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임을 고백기 때문입니다. 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불신거나 의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자기 자신이 이러한 사랑을 받는 자임을 고백할 수 있고 그것은 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이 됩니다. 이는 그 다음에 나오는 골짜기의 백합화에서 더욱 잘 나타납니다. 자신의 삶은 골짜기와 같을지라도 그 속에서 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백합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성도의 고백입니다.

  

이와 같은 성도의 고백은 아무 근거없이 무턱대고 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성도의 사랑의 고백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2절에서 보여지는 나님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나님은 이렇게 성도를 사랑십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님의 사람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다고 십니다. 전부 가시가 돋쳤고 날카로운 의심과 불신이 있을 뿐이지만 오직 나님의 성도는 나님을 믿고 따름으로서 아름다운 백합화와 같습니다. 그래서 나님의 사랑이 더욱 넘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사랑이 어떻게 삶 속에 펼쳐지는가를 보십시오. 4절입니다.

  

“[]2:4  그가 나를 인도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잔칫집과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삶 속의 깃발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의 삶은 왕으로부터 받는 사랑으로 인해서 잔치가 되고 축제가 되었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의 삶이 잔치가 되고 축제가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도 그 사랑을 나눠주고 그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는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나옵니다.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여 주었더니

  

그 종의 주인은 무턱대로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쌍히 여김이 있었고 그로 인해서 긍휼함으로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그 빚의 탕감은 긍휼히 여김의 수준이 되었습니다. 나님의 성도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서 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사랑을 요한복음에서 잘 나타납니다.

  

“[]3:16 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독생자를 그냥 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셨기 때문에 주셨습니다. 그 마음을 우리가 깨달을 때 나님의 크신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가 당면한 상황과 삶 속에서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며 섬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그러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기억며 그 사랑 속에서 살려고 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랑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 사랑이 넘치고 넘쳐야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알게 된 사랑과 있는 사랑을 밖으로 표현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때 더욱 큰 사랑을 삶 속에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으로 인해서 진실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5절을 보십시오.

  

“[]2: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라 내가 사랑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술람미 여인은 고백합니다. 자신의 사랑이 병으로 나타날 정도로 강렬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인한 변화입니다. 그렇게 사랑에 빠진 자를 위로는 장면을 연상해 보면 성도의 사랑의 표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넘치기 때문에 건포도와 사과가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건포도와 사과를 함께 나누는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말 건포도와 사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넘치는 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건포도와 사과로 함께 나누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서양에는 브라이덜 샤워(Bridal Shower)’라는 풍습이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신부(bride)에게 신접살림용품을 선물는 파티(shower)입니다. 보통 예비 신부의 친구가 주관는 결혼 전의 파티같은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에 다른 사람들도 함께 참여면서 같이 기뻐는 분위기입니다. 사랑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는 기쁨도 넘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나님을 사랑할 때만 나타납니다. 나님의 말씀을 사랑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찬양을 사랑는 것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사랑거나 봉사를 사랑는 것도 확실한 방법은 아닙니다. 오직 나님을 아가서처럼 사랑할 때만 가능합니다. 왜냐면 그럴 때에만 나님의 사랑을 받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님께로 나아가는 도구들은 나님 자신과 같은 인격적인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도구들은 나님을 의식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을 사랑는 것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진정한 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진심으로 나님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넘칩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사랑을 나누고 성경을 같이 읽으며 사랑을 나누고 기도를 함께 면서 사랑을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형식과 규칙을 중요시 는 것보다 믿음과 사랑을 더욱 중요시 해보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의 삶은 나님과의 사랑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넘치는 사랑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시고 우리가 나님을 사랑합니다. 그 크신 사랑심 속에서 기쁨이 있고 긍휼이 있으며 축복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나님의 사랑이 삶 속에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복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성

  

1. 나님과 성도의 사랑의 관계는 다른 모든 대상으로 확산될 수 있다

  

2. 나님께서 사랑시는 사랑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3. 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 성도의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으로 그 사랑이 확대된다.

  

4. 성도의 삶은 나님의 사랑으로 풍성해질 수 있고 그럴 때 복된 삶을 경험게 된다.

  

 

      
소원교회
1.신앙구조
2.성경적용
3.마음변화
4.변화방법
5.신앙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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