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47고후13; 1-4 달라진 고린도 교회와 강하신 그리스도_1Loading the player...
47고후13; 1-4 달라진 고린도 교회와 강하신 그리스도_1
2025. 8. 24. 주. 주일오전.
찬양: 14. 주 우리 하나님, [92장] 위에 계신 나의 친구 [353장] 십자가 군병되어서 [515장] 눈을 들어 하늘보라
개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다스리심, #73절제 [고후]13:1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고후]13: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고후]13: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신앙인의 모습이 항상 일정하고 변함없으면 좋겠지만 살다 보면 이전과 달라진 성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열심이 있고 적극적으로 교회에 참여 했었지만 어느 시기 이후에는 열심이 사라지고 소극적으로 교회에 다니거나 아니면 아예 교회에 다니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렇게 변화되듯이 교회도 시간이 지나면 달라집니다. 이전과 다르게 발전되고 성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퇴보하고 위축되다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도 이러한 원리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위대한 나라를 세우기도 했었지만 그 나라가 사라지는 경험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이스라엘은 성경에 나오고 서기70년에 로마에 멸망한 고대 이스라엘이 아니라 1948년에 세워진 이스라엘국(The state of Israel)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지속되어야 하며 어떤 것을 유지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 그걸 잃어버린다면 그 다음에는 퇴보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달라진 고린도교회와 그 성도들에게서 무엇이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고 그 변질을 어떻게 다시 좋은 것으로 되돌릴 수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안 좋게 변화된 성도나 교회는 어떻게 해야 좋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 원리가 오늘 말씀 속에서 나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고후]13:1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고후]13: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고린도 교회에 보낸 뒤에 두번째 방문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다시 고린도 교회의 어려움을 듣고 그들에게 이 고린도후서 편지를 보내면서 세번째 방문을 계획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모로 사도 바울의 안타까움과 근심의 방문과 단호한 질책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전 고린도전서에서의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외부영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문제는 ‘분열, 음행, 성도 간의 소송, 결혼과 성생활 문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 문제, 성령의 은사 문제, 부활에 대한 논쟁’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에 나타난 그 이후의 문제는 그들의 내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분열, 음행, 성도 간 소송, 거짓 교사들의 활동’ 바로 그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사도 바울에 대한 저항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이미 행하기도 했고 이후에 하려고 했던 일은 ‘안타까움과 근심과 책망’ 등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죄를 지었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끊고 내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바로잡고 고치며 올바르게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자르려고 하는가 아니면 붙이려고 하는가가 교회의 문제와 성도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방향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문제와 성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은 끊고 버리고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연결하고 찾고 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안타까워하며 근심하고 질책했던 것이지 깔끔하게 끊고자 했다면 그런 식으로 노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알아야 하는 성도의 변질과 교회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걸 알 때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 지은 죄로 인해서 타락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다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래서 근심과 걱정과 훈계와 책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거나 끊었다면 자신의 좋은 마음 상태는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기억해서 우리도 교회와 성도에 대해서 쉽게 포기하는 마음이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그런 마음과 태도 속에서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이 변화되고 발전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를 그렇게 생각할 때 가족과 이웃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을 다시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만약 교회나 성도가 그것을 거부하거나 대항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의 의도와 목적은 너무 좋은 것이었지만 만약 바울이 그렇게 했다고 해서 너무 변질되고 타락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적대시하면서 바울이 용서하지 않겠다고 할 때 그러면 자신들도 바울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바울의 모든 노력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단순히 바울 개인의 의지나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뜻과 기준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프고 괴롭다고 해서 죽여서는 안 됩니다. 괴롭다고 할 때 해야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붙들어야만 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고후]13: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약하여 지셨음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활하셨고 그 뜻가운데서 더욱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들을 살리려는 강하고 분명하며 확실한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순종할 때에 약한 것 같지만 그럴 때 더욱 강해집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의 원리 속에 우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도 약하지만 교회와 성도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함께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만 생각하면 이래도 걱정이고 저래도 걱정이 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은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죄성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옳은 일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와 함께 살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할 때만 우리는 옳은 일을 할 수 있고 그럴 때 주님은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나는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서기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인해 멸망 당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예루살렘에 없었습니다. 에루살렘이 함락될 때 도망쳐나온 사람들이 마사다에서 끝까지 저항할 때에도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미 피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눅]21:20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눅]21:21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끝까지 남았던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죽임을 당했고 그것은 불순종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모든 돌이키게 함과 권면함과 책망함의 근원인 것이지 자기 기준이나 권한을 자기 중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고린도교회와 성도들이 끝까지 사도 바울의 말을 따를 때 그로 인해서 그들 자신이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모든 변질과 타락을 어떻게 바로잡는가를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강함을 의지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지는 것이고 그 온전함으로 인해서 파국이나 멸망이나 종결을 원하지 않고 구원과 도우심을 바라는 지혜로운 자들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강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며 함께 하심을 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침내 이루실 온전한 교회와 성도를 바라보며 더욱 열심히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