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묘지공원이라고도 부르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다. 절두산순교기념관이 천주교의 성지라면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개신교의 성지다. 양화진처럼 구교와 신교의 성지가 지척에 자리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양 화진에 처음 묻힌 이는 알렌에 이어 광혜원 원장이 된 헤론이었다. 그는 고종 때인 1890년 진료 중 이질에 걸려 34년의 생을 마감했다. 시기가 7월 말인지라 제물포의 외국인 묘지까지 옮기는 것이 불가능해 묘지터를 양화진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 이면에는 외국인의 묘지를 무상으로 조성한다는 영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이 작용했다. 알렌을 필두로 우리나라에서 숨을 거둔 선교사나 교육자들 역시 양화진 묘지에 차례로 묻혔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는 우리나라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양화진에 100주년기념교회를 설립했다. 직육면체의 조합처럼 보이는 100주년기념교회는 묘지공원과 잘 어우러진다. 묘지공원 하면 흔히 보는 공동묘지를 떠올리지만 외국인 묘지공원답게 이국적이다. 외국의 어느 묘지공원을 걷는 듯한 기분이다.
묘지는 100주년기념교회와 한강 사이의 부지에 자리한다. 둔덕 아래로 길을 내고 6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그 가운데는 대한매일신보의 토머스 베델,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턴,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한 아펜젤러 등 우리나라 근대사의 한 장을 장식하는 외국인도 많다. 묘소나 묘비에 저마다의 개성을 살려 외국인 묘지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500명에 가까운 외국인이 묻혀 있는데, 고종의 밀사로 미국과 헤이그를 다녀온 헐버트 역시 이곳에 묻혔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인물로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묘비문에서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느껴진다. 묘지 사이에 난 길을 따라 산책 삼아 걷노라면 숙연한 마음이 생겨난다. 먼발치로는 한강의 풍경이 펼쳐져 종교와 무관하게 다녀올 만하다. 일요일은 예배가 있어 개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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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일에는 추석을 맞아서 대학부 순 후배들과 양화진에 갈 계획을 하고 처음 양화진에 다녀왔다. 죽음을 통해 보여주는 수많은 영혼들의 엄숙하고 숭고한 메시지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고 적힌 헐버트의 묘는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수많은 비석들은 전쟁의 상처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총탄이 할퀸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어떤 십자가는 부러진채 비석 위에 올라와 있어 전쟁의 지독한 모습마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언덕 위쪽에 묘들을 보던 미혜가 불러서 찾아낸 것이 바로 언더우드의 묘, 그리고 그 옆에는 양화진에 처음 묻힌 선교사인 존 헤론의 묘가 있었다.
하 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 그의 묘비명이다. 자신도 마찬가지로 한국의 영혼을 위해 자신을 주었다는 의미인가. 생각해본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귓전을 스쳐 지나간다. 존헤론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해 테네시 의과대학을 개교이래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주변의 끈질긴 만류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모교에 남아서 후배를 양성해주게, 자네같은 사람은 한사람의 의사가 되는 것보다, 보다 많은 의사를 양성하는 일에 헌신하는 길을 택해야 하네' 그러나 그는 안정된 길을 택하지 않았다. 소설 양화진을 통해 읽는 존헤론의 이야기는 수많은 도전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외에 정신여고를 세운 벙커, 수많은 업적을 남긴 로제타 홀, 언더우드와 알렌 선교사 등의 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을 것이다.
묘 지 한 구석으로는 조가마한 묘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이 보이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로 이 땅에서 태어나자마자 죽어간 선교사 아기들의 무덤임을 보게 된다. 어떤 아이는 태어난 날과 죽은 날이 같고, 태어나자마자 3일 만에 죽은 아기 한달 정도 살다 죽은 아기등. 수많은 무덤이 있다. 결핵과 콜레라, 천연두 등이 만연했던, '미개'했던 나라 조선에 찾아들어온 선교사들의 아기들의 삶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