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교육] 51골 2; 20-3;3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는 사람들2Loading the player...
51골 2; 20-3;3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는 사람들2_5
2022. 4. 24. 주. 주일오후. 온라인설교.
*개요: [골]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골]2: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골]2: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골]2: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골]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오늘날 우리는 세상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이 혼재해 있는 삶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가르침을 따르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가르침을 따르면서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교회에는 바로 가르침의 방향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금욕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것들인데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성도는 성장하고 성숙해진다고 했습니다. 이런 식의 가르침을 따르다 보니 골로새 교인들에게는 큰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주님을 믿게 된 새로운 신자들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관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삶에서 내가 더욱 거룩하고 경건해져서 사람들의 좋은 평가와 평판을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자기의 행동을 얽매이게 하고 규제하는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룬 자들은 자기의로 가득 찬 교만에 빠졌고 그것을 이루지 못한 자들은 실의와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교회 생활을 오래해도 진정한 신앙의 성장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드러나지는 않지만 은밀히 육체를 따르는 죄악된 삶의 모습은 여전히 바뀌어 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가르침은 사실 자기 자신을 위한 가르침이었지 하나님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방향성은 결국에는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렇게 의문과 규례와 금지하는 법들에 순종하려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골]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골]2: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골]2: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그것은 사실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위한 것이었지 하나님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현재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의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명과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하나님께 방향성을 두고 나아가겠지만 세상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세상에 방향을 두고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경계하고 비판하였던 것도 그 당시 사회의 '사람의 명과 가르침'이었습니다. 그 당시 풍미했던 유대종교와 헬라 철학사조와 금욕주의의 풍토 속에서 기독교도 그러한 금욕주의적인 모습을 많이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는 '사람의 명과 가르침'이 변했습니다. 뭐든지 해도 좋다는 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붙잡아도 되고 맛보아도 되고 만져봐도 된다는 식의 가르침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가르침은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들입니다. “[골]2: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자의적 숭배나 겸손이나 고통은 줄 수 있어도 육체를 따르는 것을 막는 데에는 효과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자극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여러 가지 부끄러운 일들이 사람들의 목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저 잘 먹고 잘 살자는 것, 웰빙의 바람을 타고 조금 더 편하게 행복하게 살아보자는 것, 대박의 환상을 꿈꾸며 노력하지 않는 일확천금을 바라게 되는 것, 모든 노력과 희생은 노후를 편안하게 보내기 위한 목적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향한 소망과 목표를 갖게 된다는 것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사람의 명과 가르침'은 우리 그리스도인들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비록 지금까지는 조금 흔들리며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어서 속히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러한 세상적인 성공과 쾌락과 평안에 있지 않습니다. 3장 1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골]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어느 시대이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여전히 변함없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헛된 삶을 살지 않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땅히 바라보아야 할 것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가게 된 자들이라면 우리의 관심사는 그 나라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 나라에 관계된 것이 '위의 것'입니다. 그 ‘위의 것’을 찾고 추구하고 취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목표가 되어야만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직도 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아랫 것인 '세상 일'에 목표를 두며 살지 말아야 하고 위의 것인 '하나님 나라의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가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 3절을 보십시오.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전혀 반응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표를 공유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할 때에 우리의 생명은 가장 왕성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원래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과 목표와 사명을 감당할 때에 가장 행복합니다. 가장 평안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들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땅의 것을 쫓지 마시고 정말로 생명이 되는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2절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을 생각하게 합니다. “[골]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 말씀대로 위의 것을 생각하고 그 속에서 감추어 졌던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평안과 우리의 즐거움과 바라볼 때 온전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헛된 세상을 쫓지 말고 주님 안에서 놀라운 평안과 기쁨을 누리기 위해 더욱 위의 것을 쫓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삶 속에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4생활설교 관련글[더보기]16설교소감 관련글[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