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계획] 10삼하 2; 1-5 응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다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10삼하 2; 1-5 응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다_1
2024. 10. 13. 주. 주일오전예배.
*개요: #51계획 [삼하]2:1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삼하]2:2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삼하]2:3 또 자기와 함께 한 추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다윗이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읍에 살게 하니라 [삼하]2:4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삼하]2:5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를 고민하게 되는데 가장 좋은 결정을 내리려고 하면 어느 편이 더 좋은지 몰라서 아무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결정을 내리려고 하면 또 그 이후에 생길 일이 걱정이 되어서 역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흔히 이야기하는 ‘결정장애’가 일어납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식으로든 결정하든 혹은 다른 사람이 결정해주든 결과가 나타나지만 바로 이런 상황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삶 속에 신앙이 나타나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결정을 묻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에게처럼 그때마다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께 물으면서 우리는 신앙적인 분별을 하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라고 해주시지 않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간절히 찾기 때문입니다. 스승이 제자를 키울 때 매번 모를 때마다 대답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는 스승이 대답해주기를 바라겠지만 그건 진정으로 제자를 위하는 방법이 아니고 그렇게 해줄 수도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더욱 그렇습니다. 대답해주시는 하나님만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깨달아가는 지혜의 발전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 응답을 사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그 응답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에게 갈 길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나옵니다. 하지만 다윗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실행한 것은 아닙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중요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기다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걸 이해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무턱대고 아무 생각을 안 하고 응답해주시기만을 기다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 이상으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삼하]2:1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처음에 나오는 ‘그 후에’라는 의미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배한 다음을 의미합니다. 그 전쟁에서의 패배 속에서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하였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겼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왕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언약궤도 사라져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울왕이 죽었기 때문에 다윗도 더 이상 도망 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다윗은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면서 자신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에게는 여러 선택이 있었습니다. 블레셋 지역을 떠돌고 있었으니 계속 그 지역에 있을 수도 있었고 쫓아다녔던 사울왕이 사라졌으니 이스라엘 외곽지역에 들어가 여생을 조용히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자신이 사울왕의 뒤를 잇는 새로운 왕이 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왕권을 차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스스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에 응답하셨습니다. 이렇게 간구에 응답하시는 것만 있다면 우리의 선택을 항상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간구가 없어도 응답을 받기는 가능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없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자체가 선택과 결정이 신앙적인 것이 되도록 변화시킵니다. 그럴 때 자신의 욕심을 따르는 것으로부터 떠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결정을 얻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래서 결정을 못 했습니다. 또한 가장 나쁜 결정을 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결정을 해도 혹은 안 해도 괴로웠던 것입니다. 좋고 나쁘고를 넘어서는 더 가치 있는 기준을 가지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단순해 보이는 결정이 숭고한 결정이 됩니다.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한 결정이 영원을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응답이 있어야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딱딱 응답을 받는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다윗이 응답 받은 사건으로는 만족을 못합니다. 내가 그런 응답을 받는 사건을 경험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자신이 경험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삶에 구체적인 상황으로 나타나는 것도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그걸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경험적인 응답만을 원한다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논리 이면에는 더 좋은 것을 얻고자 하고 더 나쁜 것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결정장애’에 빠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택시를 타야 할 때 탈지 말지를 계속 고민하다가 놓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버스를 타야 할 때, 전철을 타야 할 때, 비행기를 타야 할 때 계속 고민만 하다가 결정을 못한다면 모든 계획은 무산되어 버릴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민만 하다가 신앙을 얻지 못한다면 구원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단지 하나님의 경험적인 응답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닙니다. 상황적인 응답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의 다음 행동을 보십시오. “[삼하]2:2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삼하]2:3 또 자기와 함께 한 추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다윗이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읍에 살게 하니라” 그가 자신의 가족과 지금까지 함께 한 추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다 데리고 간 것은 하나님의 응답 때문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헤브론으로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때문에 그 다음 행동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응답 만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니까 하나님의 응답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았다면 그것은 내용이 무엇이든지 항상 따라야만 하는 하나님의 응답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의 연속성 속에서 그 응답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우리와 교통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그 뜻을 구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응답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가장 나쁜 것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또한 가장 좋은 것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좋고 나쁘고는 순전히 나의 기준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족들 사이에서 가장 낮은 순위가 된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고 가족들 사이에서 가장 높은 순위가 된다 하더라도 어색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높고 크신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온전하신 뜻을 찾고자 할 때 우리는 좋고 나쁨 그 이상의 아름답고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성경에서 두 번 크게 울었습니다. 한번은 형들이 자신으로 인한 아버지의 고통과 괴로움을 말하였을 때 울었고 그 울음으로 인해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형들과 온 가족을 애굽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다음 번은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났을 때 울었는데 그로 인해서 장사를 지내고 나서 온 가족을 자신이 다 먹여 살리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가 울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고 나쁨을 떠나서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지혜를 얻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신앙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가 한 일을 보십시오. “[삼하]2:4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삼하]2:5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그는 유다 사람들이 자신을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고자 했을 때 그에 따랐습니다. 또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선행을 듣고 그들을 축복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과 욕심을 위해서 산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따라서 산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를 위대한 왕으로 또한 위대한 신앙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정장애에 시달리는 현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응답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는 현대의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응답이 의미 있고 실천하는 하나님의 뜻이 가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사모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가는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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