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희락] 52살전 5; 14-18 범사에 감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Loading the player... .
52살전 5; 14-18 범사에 감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_1
2024. 7. 28. 주일오전예배.
*개요: #62희락, [살전]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살전]5: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살전]5:16 항상 기뻐하라 [살전]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오늘 말씀은 아주 유명한 성경구절입니다. 성화나 성구액자로도 많이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많은 성도들이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성도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또한 범사에 감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완성되는 모습은 기뻐하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감사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될 때 감사하는 것은 기뻐하고 기도하게 하는 삶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 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게 됩니다. 반대로 기뻐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게 되면 성도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별로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는 하지 말아야 하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은 해야 하는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단순하게 기뻐하고 간구하고 감사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든지 말든지의 의미가 아니라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의미가 아니라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의미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걸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구원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에는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그걸 이해할 때 우리의 구원의 가치가 이해됩니다. 16절부터 보십시오. “[살전]5:16 항상 기뻐하라 [살전]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기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하게 할 수 없으니 아예 할 수도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이것이 우리의 방향이요 지표요 목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완벽히 이룰 때에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나가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학생이 학교에 다니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완벽한 학업성취도는 100%입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배우도록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배워야 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에 대해서 성취도는 낮을 수 있더라도 그걸 배우려고 노력할 때 계속해서 학생이 될 수 있습니다. 학생이 퇴학당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배워야 하는 것을 배우지 못해서 성취도가 낮아서 퇴학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기 때문에 퇴학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지 않고 쉬지 말고 기도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뜻이 무너지거나 포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그러한 방향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뜻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학업이 발전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녀를 버리지는 않습니다. 더 잘 하게 되면 좋지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려고 한다면 그 모습 자체를 기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많이 도와줄 것입니다. 부모님 자신이 도와주지 못한다면 따로 선생님께 부탁해서라도 그렇게 되도록 도울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이 뜻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 뜻을 따를 때 우리는 완벽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천사와 사탄을 비교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대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천사가 있고 사탄이 있습니다. 천사의 종류도 있고 사탄의 종류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종종 이야기 듣는 귀신이나 영매나 각종 신령들은 전부 사탄의 유형에 속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영적 존재에 대해서는 전부 일관된 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고 들을 수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귀신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귀신이 있으면 그 위의 천사도 있고 그 위의 하나님도 계시는 것인데 귀신은 있지만 하나님은 볼 수 없으니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냥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안 믿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었다면 귀신의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귀신이 ‘기뻐하고 간구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귀신의 존재는 ‘슬퍼하고 훼방하고 원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은 그래서 귀신이 무서운 것입니다. 귀신이 분노하고 짜증내고 한을 품고 절망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때 ‘귀신은 역시 귀신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에도 그런 귀신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반대로 천사가 그렇게 하리라고 상상할 수는 없습니다. 천사는 ‘기뻐하고 간구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말 항상 기뻐하고 쉬지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면서 사는 존재들입니다. 반면 성도는 이 세상에 살아갈 때 많은 부족함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아직 훈련 받지 않았고 아직 신앙에 대한 이해도 부족합니다. 세상에서의 성도의 모습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인간의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이 죽어서 천국에 가면 천사와 같은 자들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에서 온전하게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천국에 가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신앙적인 모습의 결실과 성취를 볼 수 있으니까 천국에 소망이 있는 것이지 그냥 심드렁하게 가게 되는 천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을 가고 싶다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이루기를 원했던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그걸 보고 싶기 때문에 천국을 사모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단지 지옥 가기 싫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이러한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은 이 세상에서도 충분히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소망하며 응원하고 기다리기 때문에 그런 천국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14, 15절에 나옵니다. “[살전]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살전]5: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 감정에 고취되어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식대로 감사하기만 한다면 그건 초긍정의 삶의 태도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삶이 아닙니다. 좋은 게 좋은 낙천적인 삶일 뿐입니다. ‘케세라 세라’(될 일은 될 것이다)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감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나오는 것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선을 주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게으른 자를 권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를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는 것은 감사할 때만 가능합니다. 이런 삶을 과거에 살다가 중단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더 큰 욕심이 생기고 더 큰 바램을 가진다면 감사가 사라집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와 다른 필요에 대한 간절함이 생기면 방금 감사한 일이 있었더라도 그 감사한 마음은 이내 사라집니다. 다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가 사라졌다면 선을 주도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계속 감사하니까 선을 주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이러한 삶을 살아간다면 그는 진정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는 자입니다. 또 이어지는 말씀에서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항상 선을 따르는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범사에 감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설명은 할 수가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는데 악으로 악을 갚지 않거나 선을 따르거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는 역시 감사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쫓던 사울을 죽이지 않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으심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감사하기 때문에 복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죽었을 때 그를 팔았고 그로 인해서 보복을 두려워 하던 형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섬기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 감사할 때 우리는 많은 일들에서 그 감사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 감사로 선을 행하는 것이고 그 감사로 봉사하는 것이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삶으로 나타날 때 우리의 감사는 진정한 감사가 됩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범사에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범사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천국을 소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는 크신 사랑을 더욱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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