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인내] 41막 2; 6-11 죄 사함에 대한 권세와 구원의 의미Loading the player...
41막 2; 6-11 죄 사함에 대한 권세와 구원의 의미_1
2023. 6. 11. 주. 주일오전예배.
*개요: 마가복음에서 사람을 세움, #64인내
[막]2: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막]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막]2: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막]2: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막]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막]2: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지붕을 뚫고 온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죄 사함을 받은 것은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도 주님께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의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절박하고 간절하게 주님의 용서하심을 바랄 때 우리는 참된 믿음을 갖는 사람들입니다. 그로 인해서 예수님의 용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중풍병이 없다고 해서 주님께 나아갈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모든 괴로움이 바로 그런 중풍병과 같은 예수님께로 나아갈 이유입니다. 내 자신의 문제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야 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가정의 문제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야 하고 교회 문제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문제든지 주님께 가지고 나아가야 하고 그럴 때 주님의 죄 사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왜 죄의 문제인가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태어난 것이 죄인가요? 가족이 있는 것이 죄입니까? 결혼한 것이 죄입니까? 결혼 안 한 것이 죄입니까? 학교에 들어간 것이 죄입니까? 직장이나 사회나 지역이나 국가에 속한 것이 죄입니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있다면 그런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있겠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면 그런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그 의문 속에서 그런 생활의 모습이 죄가 아닌 하나의 중립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에 대한 설명은 이런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사실 다 죄인데 그 이유는 그 속에 있는 의도와 목적이 전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의도가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이유였던 것처럼 지금도 그 모든 이유와 목적 속에서 인간은 죄 속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모든 죄를 사해주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아갈 수 있고 또한 나아가야만 합니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6절부터 보십시오. “[막]2: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막]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막]2: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서기관들이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죄사하시는 권세를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권세를 낮추기 위해서 그 권세를 부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악한 죄임을 주님은 다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그 모든 알고 계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행동을 아실 뿐만 아니라 마음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는 죄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놀라운 소망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예수님께 용서를 받으려고 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이 죄인인 것과 예수님이 심판의 권세가 있으신 분임을 깨닫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름 그 죄를 더욱 확장합니다. 원래 태어난 것부터가 죄였지만 그 죄를 깨닫고 주님을 의지하면 의를 얻을 수 있지만 그 죄를 거부하면 그로 인해서 살아있는 내내 더 큰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그 죄 가운데에서 죽습니다. 그 죄로 인해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가족이 있는 것이 죄고 결혼을 한 것이 죄이어서 그 죄값을 치르고 죄 사함을 받고자 하면 거룩한 사랑과 놀라운 소망을 갖게 되지만 그 죄를 부정하면 그로 인해 가족을 외면하고 결혼을 부인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죄를 부인하면 부인할수록 더 큰 죄를 짓게 됩니다. 음주운전 단속을 피해서 도망가다가 뺑소니에 사망사고에 결국은 자기 자신도 죽는 사건을 보면 그런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죄는 사라지지 않고 더 큰 죄로 인한 심판만 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권세가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죄를 쌓고 부인하고 회피했을지라도 지금부터는 주님께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나온다면 주님의 용서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자신의 그러한 권세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막]2: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막]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막]2: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예수님은 ‘죄 사함을 주신 것’과 ‘중풍병이 낫게 하시는 것’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쉬운가를 생각해 보게 하십니다. 더 쉬운 것은 ‘죄 사함을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해주셨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에 그것이 정말 이루어졌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다음에 말씀하신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두 번 설명하심으로 인자에게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고 그 말씀 대로 중풍병자는 죄 사함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서 병도 나을 수 있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권세를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죄 사함을 구할 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으며 그로 인해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시며 동시에 심판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나아갈 때 문제가 해결되며 그로 인해서 그 결과가 나타나게 하십니다. 그 모든 것이 전부 주님의 권세에 따라서 되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유적을 보고 나서 박물관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습니다. 형형색색 아름다운 조각품과 유물들을 보면서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밖에서는 무너진 건축물들만 볼 수 있었지만 박물관 안에서는 고대에 있었던 놀라운 기술과 문화 수준에 대해서 감탄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대단한 문화는 전부 우상숭배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세속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연약한 자들을 불러서 구원받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는 성도에 대한 부르심이 얼마나 특별한가를 말하였습니다. “[고전]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1: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쩌면 지금도 주님을 찾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어떻게든 해결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꼭 주님이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지 해결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 사함을 주실 필요도 없고 예수님이 상을 들고 일어나 집으로 가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름 그대로 살다가 죽으면 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나아와 간절함을 가졌을 때 결과가 달라지고 본질이 달라졌습니다. 죄인이었던 자들이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용서함을 받은 자들이 심판의 장소인 지옥에 들어가게 하지 않으시고 용서함의 장소인 천국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냥 주님이 주님의 나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더 큰 죄를 계속 짓게 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더 큰 심판으로 나아갑니다. 본질상 지옥 이외에는 죄인이 갈 곳이 없습니다. 지옥에서만 죄인이 자신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심판과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괴로움을 가지고 절박하고 간절하게 주님께 나아올 때 비로소 우리의 죄가 청산되고 주님이 주시는 구원을 누릴 수 있습니다. 천국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로 그 나라의 주인임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 사함을 사모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럴 때 주님이 의로운 분이시며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용서하시며 그런 권세가 있는 분으로 고백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구원의 의미입니다. 주님께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모든 괴로운 속에서 주님께 나아가 보십시오. 그럴 때 주님은 받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방법으로 죄를 사하시고 구원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주님께 간절한 믿음으로 나아가서 들으심을 얻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성: 4극본적해석 1. 예수님께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인생이 죄 속에 있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은 그 모든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시다. 3. 예수님의 권세는 그분이 심판자이시며 구원자이심을 보여준다. 4. 죄 사함을 사모할 때 비로소 구원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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