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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43요17;1-5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2



 


 

43요17;1-5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2_6_3

 

 2013.7.29.월. 전교인수련회. 저녁집회2. 상담설교-희생

 

*개요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번 수련회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붙드시고 능력 주시는 그 은혜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감당할 수 없을것 같지만 그러나 능히 감당해 내는 우리 자신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 능력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인내하고 참고 견디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더욱 근거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생수가 어디서부터 흘러나왔는지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그 생수의 근원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 놀라운 힘이 어디서 왔는지를 찾아본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그 힘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우리는 그분의 희생과 인내,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려고 합니다. 그 근원 속에서 우리가 누렸던 도우심에 대해서 커다란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를 깨닫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부터 2절은 우리가 은혜의 물줄기를 찾아 들어갈 때 제일 먼저 접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의 예수님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몰랐던 예수님의 모습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능력이 여기 있습니다.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내내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오랫동안 때를 기다리시던 예수님이 마침내 선언하십니다. '때가 이르렀사오니' 정말 예수님의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침내 인류의 죄값을 감당하실 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고 사명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는 때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이전에 영화롭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영화로우심이 나타나는 때입니다.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셨는지 자기 백성을 얼마나 구원하기를 원하셨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얼마나 귀한 댓가를 치르셨는지를 보여주는 때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또한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되십니다. 제사를 통해 죄사함의 은혜를 주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한 죄사함을 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고 그 영광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더욱 영화롭게 되시는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영화로움이 있습니다. 또한 놀라운 아들 예수님의 영화로움이 있습니다. 이 두 분은 참으로 놀라운 분들입니다. 한 분은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한 구원계획을 수립하셨고 피조물이었던 인간을 그분의 자녀로 삼아주시기로 작정하셨으며, 다른 한 분은 그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비참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셨고 그리고 이제 자신의 생명을 죄인들에 대한 죄값으로, 그리고 그들을 자녀로 삼으시기 위한 대속물로 버리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영화로우심과 예수님의 놀라우신 영광이 이 구원사역을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었던 이 엄청난 구원계획과 은혜로우심에 대해서 선포하십니다.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말이야 이해가 되지만 의미는 쉽게 와닿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게 하실 때에 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을까요?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들은 만민 중의 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오직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만 영생이 주어집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만민을 심판하시는 권세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가 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모든 자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피로 대신해서 그 죄를 용서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하면 재판정에서 판사가 예수님이 되시고 변호사가 예수님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또한 피고인 인간의 모든 죄값에 대해서 그 값을 치루는 변제자가 역시 예수님이십니다. 피고인 인간이 사형을 받았을 때 대신 사형을 받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분이 판사이고 변호사이며 변제자일 뿐 아니라 죄인 대신 죄값을 치루는 대리자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서 이러한 일을 행하실까요? 그 이유는 주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은 친히 그 모든 죄악에 대해서 대리자가 되기를 자처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4절은 바로 이것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7: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정말로 사랑하셨다는 설명보다도 오히려 예수님이 자신의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셨는지를 보는 것이 그분의 사랑을 더 잘 나타냅니다. 그 사랑은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그냥 도와주고 붙들어 주고 인도해 주고 끝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랑은 완전하게도 영원토록 함께 있고자 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이 계시는 곳에 함께 있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주셨던 그 상상할 수 없는 넘치는 영광을 바로 그분의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면 그와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가 친구면 집에 데리고 오고 싶어하고 그가 애인이면 부모님께 소개해 드리고 싶어하고 그리고 함께 살아가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정말 평생을 함께 살아가지 않습니까?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이유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면 그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에게 숨기는 것이 없습니다. 나의 은밀한 자랑도 나의 감추었던 능력도 나의 숨겨놓았던 모든 것을 다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은 진정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또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하실 때에 그것은 완전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더 나아가 우리를 사랑받는 자녀로 삼아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그분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신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경시키기 위해서 모든 핍박과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셔야만 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있어야만 했습니다. 모든 핍박과 고난을 경험하셔야 했고 마지막에는 생명을 버리셔야만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세상의 자녀이자 사탄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모든 죄값에 대해서 사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서 20절부터 26절은 예수님의 고통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그 장면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마27: 21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22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 주니라"

 

여기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주님은 바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바로 우리 대신에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순간 예수님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왜 내가 이 사람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라고 회의가 들지 않으셨을까요? 왜 이런 자들을 나의 자녀로 삼아야 하는가 후회되지는 않으셨을까요? 그리고 모든 구원계획을 중단하고 그들을 자신의 죄로 죽게 하시고 지금 저지르고 있는 이 악한 일에 대해서 의인을 악하게 죽이려고 하는 이 모든 일에 대해서 천벌을 내리실 마음이 없으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리라는 것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악함과 완악함과 강퍅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자녀삼고자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죽기로 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그분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누군가 한 사람, 주님을 만류했습니다. '주님 그러지 마십시오. 주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한 사람, 주님을 잡는 군병들에 대해서 칼을 들며 저항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이 잡혀가시는 것을 막겠습니다. 주님, 피하십시오'  하지만 그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주님은 이일에 대해서 분명한 목표가 있으셨습니다. 칼을 들고 달려드는 군병들에 대해서도, 자신을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들에 대해서도 주님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의지가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성경에 나온대로입니다. 그 성경은 바로 주님이 직접 쓰신 글입니다. 주님이 알려주셔서 작성된 구원계획에 관한 주님의 설명이었습니다. 이 구원계획은 아주 오래전에 세워진 것입니다. 이 세상이 생기기도 전에 주님을 붙잡는 군병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주님께 대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들이 생기기도 전에 이 민족이 나타나기도 전에 주님은 이미 구원하고자 하셨고 대신 죽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의지요 열심이자 목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변하시지 않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도 변하지 않고 주님의 열정도 변하지 않으며 주님의 목표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결코 인간들의 악함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허락하실 때에 대신 풀려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바라바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바라바와 같은 사람입니다. 죄인으로서 죽을 수 밖에 없던 그 바라바가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때문에 풀려나는 바라바를 주님은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바라바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 때문에 죽는 것이기에 바라바를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그러한 주님이시기에 부활하셨을 때 자신을 배반했던 베드로를 불러주십니다. 또 찾아오셔서 믿지 않는 도마에게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주님을 핍박하던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이방의 사도로 세워주십니다.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처음에는 불신했지만 처음에는 핍박했지만 그 크신 예수님의 사랑에 압도되어서 그들은 모두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거역할 수 없는 사랑에 오히려 감격하며 감사하여 그들은 둘도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모든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또 다시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모습과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자녀 삼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충성하지 못했고 인내하지 못했던 우리들을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그분의 나라에 충성하기 위해서 그분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또 다시 버림받고 외면당하며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우리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그 모든 고통을 다시 당하십니다. 주님의 희생과 고통은 지금도 우리들을 대상으로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정말 괴로웠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신형교회의 성도로서 우리가 정말 힘들었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교회의 한 일원으로서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무엇을 피하고 무엇을 안하고 싶었을까요? 적은 수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 무엇이었나요?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들은 모두 다 나를 기점으로 갖게되는 고민이자 괴로움일 것입니다. 이일에 대해서 저는 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돈을 줄 수도 없고 편안하게 해 줄 수도 없고 즐거움을 줄 수도 없으니까요. 그것을 완전히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밑빠진 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진정한 필요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바로 여기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은혜의 생명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발견하는 은혜의 근원은 거부하는 자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생명을 버리시는 예수님의 희생입니다.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들을 위해 필요한 구원계획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주님은 인간들을 너무 사랑하셨지만 인간들에게 의존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시지만 우리들에게 의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항상 주님을 실망시킬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일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우리도 사람들에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지 우리의 의존의 대상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에 의지해 버리면 우리는 그에 따라서 좌지우지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반응과 사람들의 대답과 사람들의 호응에 따라서 잘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하고 그만두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다 잃어버리게 만드는 행동입니다. 우리에게 채워져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고 그 희생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움직이는 그분의 자녀들이 되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로 살다가 연약해 질 때가 있다면 주님은 다시 떠났던 베드로를 찾아가시는 것처럼, 다시 의심하던 도마를 방문하시는 것처럼, 다시 핍박하던 사울에게 나타나시는 것처럼  주님은 그렇게 완악하고 패역하며 불순종하고 외면했던 백성들에게로 다시 나아오십니다. 그것은 주님에게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에게라도 나타내 보이시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부르고자 하시는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주님이 있는 곳에 있게 하시기를 원하고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소망한다면 그 은혜가 우리 삶속에 나타납니다. 충만하게 채워질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속에 거할 것입니다.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계속 삶속에 풍성하게 머물것입니다. 그것이 효과가 있건 없건 간에 우리의 새로운 반응에 그들이 호의를 보이던 보이지 않던 간에 그 은혜는 우리에게 머무를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 가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물은 우리가 마시려고 한다면 우리 속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은혜는 우리가 받으려고 한다면 다시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채우는 은혜가 아니라 그 은혜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면 놀라운 일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으셨을 때에 일어난 일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0절에서 52절이 그 놀라운 일을 보여줍니다.

" 50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던 성도들을 일으켰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성소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다른 사람을 용납하면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나타내면 그래서 예수님을 닮으면 놀라운 일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자던 성도들을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혹은 예상했던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마다 언제든지 우리에게 힘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특별히 예수님의 희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희생의 은혜가 얼마나 고귀한지 얼마나 값진지, 그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 영광에 동참하게 되었는지를 보십시오. 우리도 새로운 은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부분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채워지는 삶을 살아갈때에 우리의 삶은 너무나 값지고 귀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서 그리스도의 희생이 삶속에 온전히 증거되고 고백되는 자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신형교회가 예수님의 희생을 닮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혜를 간절히 바랄 때 우리들의 삶 속에 풍성하게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 희생의 은혜를 우리가 더욱 충만하게 깨닫게 해 달라고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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