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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40마27; 21-26 민란을 두려워한 빌라도2



 

40마27; 21-26 민란을 두려워한 빌라도2_4

 

 2013.3.27.수. 고난주간 수요예배,

 

*개요  

 

21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1)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두려워 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큰소리를 쳐도 사실은 그 속에 무엇인가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자연히 형성되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대한 두려움,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부모로부터 벌을 받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나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친구들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 수많은 두려움들이 인간에게는 존재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어떤 면에서는 나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좋은 면으로 작용할 때가 있습니다. 더욱 노력하게 되고 더욱 최선을 다하게 되고 더욱 열심히 살아가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에게 때로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을 따르는 삶에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장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로 만듭니다. 그리고 각종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또 다른 두려움을 만듭니다.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는 그것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빌라도에게도 역시 그러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죽는 데 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모든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속에 등장하는 악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부인이 만류하고 그 자신도 결코 확신할 수 없었던 가장 잘못되고 후회스러운 판결인 예수님을 사형에 처한 일을 그는 어떠한 두려움 때문에 하게 되었을까요?

그가 두려워 했던 것은 민란이었습니다.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민란으로 인해서 자신이 통치하는 예루살렘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이 자신의 권위와 위신을 망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24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1)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빌라도는 로마의 여러 가지 정치상황 속에서 간신히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받게 된 자였습니다. 이것은 더 큰 정치적 야심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발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발판과도 같은 예루살렘 통치기간에 민란이 일어난다든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난다든지 하는 일이 일어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전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본인은 손을 닦으며 애써서 그 모든 죄를 짓지 않고자 하였지만 그것은 그의 순진한 생각이었습니다. 모든 죄는 고스란히 그에게 돌아갔고 예수님을 죽인 책임을 져야만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사람을 두려워 하는 것 사이의 갈등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하나의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두려워 할 것인가.... 이러한 마음 속의 갈등은 매우 복잡하고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빌라도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과 사람을 두려워 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자신에게 유익한 것인가를 말입니다. 지금 당장은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 하는 것보다 더 큰 유익이 따릅니다.

 

이러한 차이가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두려워 하고 그로 인해서 얻게 되는 손해와 불이익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을 다 갚아주십니다. 비록 잃은 것이 무엇인가가 있었겠지만, 그로 인해 더 큰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나 환경을 두려워 하는 것은  지금 당장에는 뭔가 이익이 있는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그 이익은 오래 가지 못하고 더 큰 불이익이 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나 환경은 그 이익을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음으로서 하나님의 대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모든 정죄와 심판에서 아무 것도 자신을 보호해 주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여기에 대한 분명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입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1)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우리가 빌라도와 같은 자리에 있을 때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두려워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늘 문제는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사성어 중에 '조삼모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원숭이를 키우는 사람이 아침에 바나나를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 주었는데, 원숭이가 이를 불평해하자 아침에 네 개 주고 저녁에 세 개 주니 원숭이들이 좋아했더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도 현재의 유익을 따른다면 원숭이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현재의 유익을 생각하지 말고 미래의 유익을 생각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지금 잃을 수 있지만 나중에 보상받게 될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삶속에서 이러한 구별은 순간순간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더 큰 유익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그 유익 속에서 더 큰 죄악으로부터 피하게 되는 은혜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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