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정체성] 48고전 4; 1-5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자들2Loading the player...
48고전 4; 1-5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자들2_5
2017. 6. 23. 금. 금요철야
*개요: 고린도전서 연구, [고전]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고전]4: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이는 주시니라 [고전]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진실한 교회를 세우며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성도가 되어가는 것은 어떤 하나의 목표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아름다운 교회 하나를 잘 만들고자 하는 노력의 목표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목표가 아닙니다. 진실한 성도가 되어야겠다고 노력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목표가 아닙니다. 교회와 성도에 대해서 사람들이 또는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며 가지고 있는 목표는 무엇입니까? 교회를 세우는 것은 자기자신의 신앙생활에 보람을 갖는 것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보이기 위한 것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하자고 하니까 인간관계 때문에 따라서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성도가 되는 것의 목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의 삶의 보람을 찾으려고 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성도가 되라고 하니까 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 보기에 성도가 되는 것이 더 좋아보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목표들은 전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 때문에 갖는 목표들입니다. 이러한 목표로 교회를 세우려고 하거나 혹은 성도가 되고자 할 때에 우리는 진정한 목표를 잃어버립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이루는 데에 진정한 목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만들어서 그 교회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교회를 세우는 목적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하나님께 드리고 성도로서의 모습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믿음생활을 잘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가면 그것이 바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보내어드리거나 혹은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거나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드려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리고자 할 때에 자기 자신의 목적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목적도 사라집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드리고자 할 때에 우리는 그 어떤 목적 보다도 가장 올바르게 교회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어떤 성도 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바로 이점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고전]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때가 이르면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가 행한 교회사역과 신앙생활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실 때에 주님께서는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칭찬이나 책망이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교회를 세우고자 노력을 하고 또 그렇게 해서 어떤 성과를 거두었다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겉으로 드러난 것뿐입니다. 진정한 의미는 주님이 어둠에 감추인 것들 드러내실 때 나타납니다.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때 그 의미가 밖으로 드러납니다. 어둠에 감추인 것이 드러나고 마음의 뜻이 온전히 나타나게 되었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칭찬하십니다. 그 전에 이루어진 것들은 눈을 속이고 귀를 속이고 마음을 속일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속에 감추어진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게 될 때에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받으시는 귀한 것이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칭찬해 주십니다. 그 칭찬이 바로 우리가 받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칭찬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를 세우고 성도로서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요리경연대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조리학과 출신이나 조리기능인들이 모여서 자신의 요리실력을 겨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회는 지역별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종목별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흔히들 요리경연대회는 TV나 드라마나 혹은 신문기사를 통해서 한번쯤은 접해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요리경연대회에서 참가자들은 단체로서 하나의 팀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참여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참가자들이 경쟁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보여지는 것으로서 음식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먹었을 때 맛으로서 음식의 수준입니다. 아무리 보이기에 그럴 듯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하더라도 먹어보았을 때 맛이 없다면 그 음식은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보이기에 별볼일 없다 하더라도 먹었을 때 맛이 있다면 그 음식은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보이기에도 아름답고 맛도 아름답다면 제일 좋을 것입니다. 반대로 보이기에도 형편없고 맛도 형편없다면 제일 나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극단 속에서 제일 좋은 음식이 되기 위해서 요리경연대회 참가자들은 자신만의 실력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교회를 만들어갈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교회의 모습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의 모습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평가를 받습니다. 요리의 맛이 겉모습을 다 만들고 나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교회의 정신이나 의미나 목표는 시작할 때부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 그런 재료를 썼고 왜 그런 방식을 사용하며 왜 그런 기술을 사용하는지가 전부 맛을 결정하는 것처럼 교회사역의 방향이 왜 그렇게 되며 왜 어떠한 프로그램을 쓰지 않으며 왜 그러한 목표를 이루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끊임없는 고민과 결단과 인내가 결국은 교회로서의 맛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점 주인이 어떤 재료를 써서 어떻게 만들면 사람들이 많이 찾으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런 재료를 쓰지 않고 그렇게 만들지 않는 이유는 건강에 나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음식점은 어떻게 될까요? 아마 망할 것입니다. 손님의 입맛을 챙겨야지 손님의 건강까지 챙기려고 한다면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고 그로 인해서 전적인 희생과 헌신을 요구할 수 있는지를 알고있지만 반면에 그렇게 하면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를 만들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과연 그런 그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하나 하나의 고민과 성찰이 교회 속에 녹아 들어가 있을 때 교회는 진정한 맛을 가질 수 있고 그로 인해서 마침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기준에 맞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되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사람의 칭찬은 받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면에서는 별로 칭찬을 받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고전]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고전]4: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의 말 속에서 우리는 당대에 유명한 사도요 유명한 전도자요 선교자요 목회자요 신학자였던 바울도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판단에 대해서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너희’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외 다른 교회의 성도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판단하다’라는 헬라어는ἀνακρίνω(anakrinō) 이고 의미는‘investigate, examine, question’ 으로 ‘조사하다, 살펴보다, 의문을 품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판단하고 조사하고 살펴보는 것은 근본적으로 ‘책망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책망할 것을 찾아서 판단하고 조사하고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서나 다른 교회의 성도들에게서 그는 판단받고 있었습니다. 설교가 부실하다, 성격이 괴팍하다, 비현실적이다, 너무 고집불통이다 등등의 판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자신에 대한 이러한 판단에 대해서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유명한 사도바울이 그의 당대에는 그의 모든 것에 대해서 사람들에게는 비난이나 판단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판단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스스로 책망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자책할 것을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서 사람들에게서 옳다 인정함이나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스스로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여전히 그를 판단하고 조사하고 의심을 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버틸 수 있는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 앞에서 서게 될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얻게 될 모든 다른 사람들의 책망이나 판단이나 비난을 달게 받으며 오직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는 온전한 믿음과 확신으로 굳건히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던 굳센 마음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가 자기 중심적이었기 때문이거나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가 누군가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로 그리스도를 닮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었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주님은 이 세상에서 편안이나 유익이나 세상의 인정과 존경을 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선한 목자로서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 모든 사역을 행하셨습니까? 바로 양들을 위해서 그 양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 모든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에게나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던 목표였지만 주님은 한결같이 흔들리지 않으셨고 마침내 그 모든 일을 이루셨습니다. 바로 그런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이 되셨으나 인간의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시고 하나님만 사랑하셔서 마침내 구원사역을 이루신 그분을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요]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10: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실 때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셨습니다. 인간들의 기대와 간구에 부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하심만을 바라볼 때 인간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실 수 있었고 그 모습을 아버지 하나님은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 속에 형상화 해야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어야 하고 성도가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음식을 다 만든 다음에 얹어지는 고명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요리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만들어진 음식의 맛입니다. 그럴 때 그 음식을 먹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느끼게 되십니다. 그럴 때 바로 하나님의 칭찬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면서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세우는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았을 때 하나님은 대번에 알아보십니다. 이러한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흘린 눈물과 땀을 주님은 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이땅에 이루기를 원하셨던 그 모습을 우리가 이룰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칭찬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수고하고 잘하였다고 우리를 사랑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 목적입니다. 지난 주에 보았던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에 대해서 원하셨던 그 모든 기준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또한 앞으로의 목표이어야만 합니다. 성도로서 왜 그리스도를 닮아야만 하는가도 생각해 보십시오. 성도이지만 그리스도를 닮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가 세상을 더 닮았다고 해 보십시오. 오히려 그가 사탄을 더 닮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는 자가 교회에 다닌다고 말하는 자가 그래서 교회의 일원이요 멤버요 성도라고 말하는 자가 그리스도 보다도 세상을 더 사랑하고 사탄을 더 짝하며 그리스도를 닮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가 온전한 성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지금은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노력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 모습을 따르려고 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러한 목적과 목표가 있기에 우리에게는 분명한 정체성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분명한 기준과 확신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교회를 세우고 온전한 성도가 되고자 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고전]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는 교회의 일군으로서 교회를 세워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자들로서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노력과 애씀이 들어간 아름다운 교회를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교회의 목적은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에 이르지 못하고 단순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고자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라는 호칭에 걸맞는 교인이라는 사람들의 시선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신앙과 믿음에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 댓가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약속하십니다. 이렇게 함께 교회를 세우고 함께 성도로 성장해 나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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