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성숙] 41막 10; 13-16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을 용납하라2Loading the player...
41막 10; 13-16 어린아이와같은 자들을 용납하라2_5
2017. 3. 17. 금. 금요철야
*개요: 마가복음 연구, [막]10:13 사람들이 예수께서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막]10:14 예수께서 보시고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막]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막]10:16 그 어린 아이들을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오늘 말씀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가르침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린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것은 어린이들의 연약함과 미약함, 그리고 부족함을 예수님께서 채워주시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린이들이 일으키는 소음과 번거로움과 불편함을 보았습니다. 이제까지의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형태는 조용히 사람들이 앉아있으면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양한 예화와 비유와 설명을 통해서 장시간 가르치는 것이 기본형태였는데 그런 조용함과 정숙함을 깨트리는 것이 바로 어린이들이었습니다. 또한 어린이들에게 만져주시기를 바라고 부모들이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도 불편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린아이들과 같은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고 연약함이 있고 성숙되지 못한 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어린 자들에 대해서 어렵게 생각하는 것도 여전히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몸은 어른이지만 마음이나 생각하는 것은 어린 아이와같은 자들이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고 피하고자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서도 영적 수준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을 보십시오. “[히]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히]5: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자요 [히]5: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단지 육신의 나이가 어린 어린 아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 바로 어린 아이입니다. 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가 바로 어린 아이입니다.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 바로 어린 아이입니다. 다른 신앙인들을 이모 저모로 불편하게 만드는 자가 바로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신앙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기존 신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실천하지도 못합니다. 끊임없이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합니다. 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바로 어린 아이입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런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어린 아이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쁜 뜻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라도 되어야 성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서도 물론 어린 아이 이후의 장성한 자를 말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린 아이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고 있지만 사실 성경 전체에서 어린 아이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인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고 어른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도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이 필요합니다. 정말 나이가 어려서 어린 아이가 아니라 새로운 신자라서 어린 아이가 필요합니다. 아니면 실족했다가 다시 회복하려고 하는 어린 아이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좀 연약하지만 많은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이 교회에는 많아져야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런 어린 아이들을 귀찮아 했습니다. 불편해 했습니다.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데려오는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역자들이나 직분자들이나 일반 성도들이나 교회는 이런 어린 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을 귀찮아합니다. 불편해 합니다. 그래서 오자마자 제자들처럼 다잡으려고합니다. 그렇다면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이 주님께로 나오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그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천대시하지도 않고 불편해 하지 않고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을 받으면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래서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 어린 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말씀 때문에 어린 아이들에 대한 정의와 평가와 가치는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막]10: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려오는 부모들을 꾸짖는 것을 보고 분히 여기셨습니다. 통분히 여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은 그런 어린 아이들이, 그런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사람들이, 그런 어린 아이들과 같은 자들이 자신에게 나아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나아오는 것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금지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는 그런 자들이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만 만나고 돌아가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만져주심만 바라고 사라지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계속 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서 축복을 얻고 도움을 얻은 다음에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자들을 오히려 쫓아내려고 하고 오히려 책망하였던 제자들에게 분하게 여기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의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았던 셈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분히 여기셨던 것이고 그들의 의미에 대해서 새로운 정의를 내려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가족들이었습니다. 이런 이해는 성경 곳곳에서도 나옵니다. 탕자의 형은 탕자가 집에 돌아온 것을 보고 반갑게 맞이하고 환영하는 아버지를 보며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형은 말합니다. “눅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 아들은 어리석었었고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자를 위해 아버지는 두말없이 용서해 주시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뿐만 아닙니다. 오늘도 부자집 자녀들은 별로 하는 것도 없이 문제만 일으켜도 그들은 다 용납되며 다 공급받습니다. 왜 그들은 똑바로 사는 것 같지 않은데 그렇게 유익을 누릴까요? 뿐만 아닙니다. 어떤 부모의 자녀들은 문제도 많고 어리석은 행동도 많이 하지만 부모는 그들을 쫓아다니며 그들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냥 내버리지, 그냥 잊어버리지, 그냥 내쫓아버리지, 왜 그들을 위해 희생할까요? 그 이유는 자녀가 어리석고 미련하며 부족해도 자기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희생하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왜 그렇게 사랑하시냐고, 그런 죄많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왜 도와주시냐고, 그렇게 몸과 마음이 어린 자들을 왜 그렇게 용납하시냐고 우리가 힐난하고 비판할 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사랑을 정말로 누리고 있는 자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도 그 사랑이 아니었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사랑속에서 제자가 되었고 성도가 되었으며 직분자와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내신 사랑이나 어린 자들을 위해 나타내신 사랑이나 동일합니다. 우리가 다 그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 그 사랑을 제한하려거나 제지해서는 안되고 그 사랑을 더 많은 부족한 자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온 어린이들을 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수하시며 축복해주셨습니다. “[막]10: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주님은 그렇게 주님께 나아온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과거의 모습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주님께 나아왔다면 그들이 왜 주님께 나아왔겠습니까? 어린 아이들을 주님께 이끌고 왔다면 부모들이 왜 주님께 자녀를 데리고 나아왔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축복해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주님이 주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단지 안수만 해주고 축복만 해주고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사모하는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어쩔 수 없이 가는 나라가 아니라 마지못해 가주는 나라가 아니라 가고 싶어서 질책을 무릅쓰고 책망을 이겨내며 예수님께 나아오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왜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같이 받들지 않으면 결단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사모할 때에만이 비로소 모든 어려움과 시험을 이기고 그 곳에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순종하고 인도함을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이 오래 될 수록 오래도록 천국을 사모할수록 더욱 귀한 신앙이 됩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을 너그럽게 볼 수 있는 신앙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안아주시고 안수해주시고 축복해주십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할 때에 어린 아이를, 혹은 어린 아이같은 자들을 용납하고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금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고 사모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는, 혹은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되리라’고 한편 강도에게 말씀하셨고 지금도 우리 모든 주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합시다. 그들을 막아서지 말고 그들과 주님의 만남을 방해하지 말고 그들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줍시다. 또한 우리 자신도 어린 아이와 같은 심령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봅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따랐던 것처럼 우리 모두도 그렇게 어린 아이 같이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소망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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