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발전] 40마 13; 24-30 가라지를 이겨내는 하나님 나라2Loading the player...
40마 13; 24-30 가라지를 이겨내는 하나님 나라2_5
2019. 2. 8. 금. 금요철야
*개요: 마태복음 연구 [마]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마]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마]13: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마]13: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마]13: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서 살아가고자 할 때에 여러가지가 방해를 하지만 항상 최대의 방해자는 이 세상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해도 이 세상 나라는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물결에 흘러 내려갈 때에는 아무런 저항이 없지만 그 물결을 거슬러서 올라갈 때에는 지금까지 그렇게 도움이 되던 것이 더할 나위 없는 방해가 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면서 그 나라를 사모하면서 살아가고자 할 때에도 역시 이 세상의 나라가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게 되는 하나의 과정 속에 있었지만 어느새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방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기 위해서 이 세상 나라를 극복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온전하게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도 없고 그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 세상 나라를 극복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해야지 그렇지 않고 이 세상 나라를 극복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하나님 나라만을 사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로켓트를 우주공간에 쏘아올린다고 해보십시오. 단순히 추진력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로켓트를 올릴 수 없습니다. 함께 고민해야 하는 것은 바로 무게중량을 줄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로켓트를 잡아당기는 힘인 중력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래서 매이는 것이 없고 바라보는 것만이 있을 때 비로소 로켓트는 무사히 우주공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설명하시면서 여러가지를 이야기해 주셨는데 특별히 오늘 읽은 말씀에는 알곡과 가라지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이 알곡과 가라지라는 개념 속에서 우리는 세상 나라를 극복하면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 나라를 극복할 때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가라지를 극복할 때 진정한 알곡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가라지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천국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을 때에 처음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가라지라는 말을 쓰시기 전에는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 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알곡과 가라지의 존재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들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천국이 전부 알곡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져 있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이 알곡과 가라지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살펴봅니다. “[마] 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천국의 특징을 설명하실 때에 예수님은 천국은 좋은 씨(kalos sperma: good seed)를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 그 사람의 원수가 와서 좋은 씨 가운데 가라지(zizanion: tare, 잡초)를 덧뿌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천국은 좋은 씨만 뿌려진 것이 아니고 그 속에는 가라지도 함께 뿌려진 것이 되었습니다. 항상 좋은 씨만 존재할 수가 없게 되었고 그 속에는 가라지도 함께 섞여있습니다. 그래서 그 가라지 틈에서 알곡이 자라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안타깝기는 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좋은 볍씨와 쭉정이를 가리기 위해서 전통적으로 선별 방법을 써왔습니다. 그래서 소금물에 볍씨를 뿌려서 그 중에서 뜨는 쭉정이는 다 가리고 오직 바닥에 가라앉는 볍씨들만 파종해서 좋은 곡식을 얻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라지는 어디에선가 날아와서 밭이나 논에 자리를 잡습니다. 주인이 뿌린 씨 이외에도 다른 씨들은 함께 자라나게 됩니다. 알곡만 그득했으면 좋았겠지만 가라지는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천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천국을 바라볼 때 그곳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존재해 있습니다. 알곡은 그 속에서 가라지의 방해를 이겨내고 알곡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의 의미였습니다.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었던 신앙인들이 때로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일들로 인해서 실족합니다. 그런 안좋은 일들 때문에 이전에 해 놓은 많은 일들이 무의미하게 사라지게 됩니다. 존경을 받았으나 악명이 되어버리고 업적을 쌓았으나 그것은 부끄러운 일들이 되어버립니다. 사람들은 더욱 더 그런 실족과 범죄행위에 대해서 책망하며 질책하고 비난합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한순간에 다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더 슬프고 괴로운 일은 그 다음부터 입니다. 그런 일들을 보고 들으면서 그 다음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소망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선 사람들의 범죄와 어리석음을 보면서 그간에 했던 모든 일들이 다 무의미하게 되면서 그들이 가고자 했고 그들이 도달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들에게 불가능하거나 거북하게 보여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완전히 소망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다시 새롭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알곡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 알곡의 변질은 진정한 알곡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괴로움을 느끼게 하지만 가라지의 존재를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며 또한 극복해야만 하는 문제가 됩니다. 이제 밭에 알곡과 함께 뿌려진 가라지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봅시다. 26절입니다. “[마] 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마] 13:27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그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서 함께 있다가 결실할 때에 가라지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가 결실을 해야하는 때에 바로 가라지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종들은 주인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밭에 좋은 씨를 심었는데 가라지가 생겨난 것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시작할 때에는 정말 좋은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왜 중간에 악한 것들이 생겨났고 종국에는 이제 결실할 때가 되었는데 아무 것도 거두지 못하는 가라지들이 생겨났으니 왜 이렇게 되었는지 종들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가라지들을 보면서 그런 사람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럴 때 주인이 그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마] 13: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은 그 가라지가 왜 생겼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 가라지는 알곡이 변질된 것이 아니라 원수가 뿌려놓고 갔던 것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인이 심어놓은 좋은 씨가 변질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이 사람들이 자는 틈을 이용해서 알곡 사이 사이에 가라지를 뿌려 놓았던 것입니다. 가라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그 가라지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바램과 소망을 막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애초에 시작부터 다릅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로 인해서 자포자기하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더이상 추구하지 않을 때 세상 나라는 기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가 잘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교회가 올바르게 서고 온전하게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교회가 망하기만을 바랍니다. 성도의 삶이 올바로 서게 되기를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는 이런 저런 이유로 가정이 무너지기를 바랍니다. 그의 직장이 사라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의 신앙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애초에 이루어지기를 원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이 사회에서 이 교회에서 이 가정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했던 것인데 세상 나라는 그런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지 않고 우리의 모든 노력과 애쓴 결실들이 무너지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공격하며 교회를 비난하고 하나님 나라를 부인합니다. 열매가 맺히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들이 바로 세상 나라를 꿈꾸는 가라지인 것입니다. 사탄에게서 나온 악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 때문에 우리가 흔들리고 괴로워하게 될 때가 있지만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러한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면서 우리가 행해야 하는 일을 알게 하십니다. 이 가라지의 존재 앞에서 진정한 알곡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천국의 진정한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마] 13: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 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가라지가 진짜 가라지인지 가짜 가라지인지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주인은 그 가라지가 사실은 알곡이었는데 가라지처럼 보여서 뽑히게 되는 일을 걱정하였습니다. 주인은 밭에 뿌려진 진정한 씨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알곡이 가라지로 오인되어서 결국 가라지처럼 뽑혀지지 않도록 중간에 뽑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냥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었습니다. 추수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해 낼 수 있었고 추수 때에야 비로소 알곡과 가라지의 의미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열매를 맺지 않는 알곡은 더이상 알곡이 아니었습니다. 그 알곡은 사실은 가라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추수 때에는 알곡은 알곡대로 모을 수 있었고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라지는 단으로 묶어서 불사르게 되고 알곡은 모아서 곳간에 넣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유 속에서 나타나는 알곡의 의미란 결국 열매를 맺을 때에 비로소 본질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가라지의 존재와 가라지의 방해에 전혀 상관없이 알곡은 알곡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라지가 있고 가라지의 영향이 있다 하더라도 알곡이 열매를 맺는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내버려 두셨고 추수때까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할 때 여기에 방해가 되는 세상 나라와 세상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걸어가는 것 뿐입니다. 나중에 그들은 그들대로 모이게 됩니다. 가라지가 가라지끼리 모이는 것처럼 그들은 함께 모여서 자신들의 불신앙을 즐거워하며 자신들의 자긍심을 즐거워하며 자신들의 위세와 자신들의 향락을 즐길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알곡은 알곡대로 모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은 그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과 함께 교제하며 그 나라를 함께 고민하며 그 나라를 함께 즐거워하면서 그렇게 함께 나아갑니다.
추수 때에 이러한 차이는 분명합니다. 가라지들은 다 고개를 바짝 들고 자신의 성장을 자랑할 때에 알곡들은 다 자신이 얻은 것이 많아서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가라지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얻을 것이 많고 얻고자 하는 것이 많아서 더욱 기세등등하지만 알곡들은 이미 자신들이 얻은 것이 많고 그것들이 감사하여서 고개를 숙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파종할 때와 추수할 때에 분명하게 나타나지만 오직 자라고 있을 때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자라고 있는 삶입니다. 우리는 아직 추수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발전과 성장과 진보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럴 때 흔들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리석은 가라지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꾸준히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소망할 때 우리는 언젠가 귀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가라지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 가라지의 존재를 말씀해 주신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열두 제자들 중에도 가룟 유다가 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요한복음 6장의 말씀입니다. “[요] 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요]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결코 분위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기억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며 나아가서 그 열매를 얻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다 모아주셔서 주님의 곳간에 넣어주실 것입니다. 그때를 바라보며 우리는 당당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흔들림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시는 여러분, 그 나라를 위해서 더욱 더 열심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해오던 경건을 내려놓지 마시고 앞으로 하게 될 경건을 포기하지 마시고 꾸준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십시오. 그래서 마침내 천국이 그러했듯이 가라지들을 이기고 온전한 알곡으로 하나님 나라의 곳간에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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