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스] 15스 10; 1-4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2Loading the player...
15스 10; 1-4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2_4
2020. 8. 5. 수. 수요예배
*개요: 에스라 연구 [스]10:1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스]10:2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스]10:3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스]10:4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
에스라는 성전 안에서 울면서 애통해하면서 회개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더욱 큰 들으심이 있었습니다. 지은 죄에 대해서 죄를 자복하며 드리는 기도에 하나님은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냥 애통해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음을 애통해 하는 것이고 죄를 자복하며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슬픔과 눈물을 들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르려고 하는 것이고 그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하소연을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죄때문에 기가 막혀 앉으며 몸에 재를 뿌리고 옷을 찢으며 울며 기도하며 괴로워하면서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마음의 찔림과 회개의 역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은 울며 기도하는 에스라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무론한 큰 무리였습니다. 에스라의 회개와 통회자복에 함께 동참하기 위해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자신과 상관없는 죄로 인해서 슬퍼했습니다. 왜 그는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때문에 그렇게 슬퍼하고 괴로워했을까요? 그리고 그가 짓지 않은 죄라면 마땅히 저들에 대해서 정죄하고 비판하며 죄악을 깨닫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깨끗하고 의롭지만 왜 너희는 그렇게 깨끗하지 않느냐 의롭지 않느냐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그렇게 에스라가 이스라엘의 죄때문에 스스로 자복하고 회개했다고 해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에게로 몰려들까요? 왜 그의 눈물과 슬픔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쳤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왜 에스라의 눈물을 비웃거나 무시하거나 모른척해 버리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에스라가 자신들을 위해서 울며 애통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에스라는 오직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이 대표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죄를 자복해야 하는 간절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울며 기도하는 것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통해 하는 것만으로도 기도하며 죄를 자복하는 것으로 주님의 응답은 임합니다.
에스라의 애통함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의 반응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이 하나님께 더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 나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에스라의 눈물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나아가게 만든 기폭제였던 것입니다. 그 기도를 들으사 하나님께서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그 마음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죄나 문제에 대해서 그 일에 우리 스스로가 관여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비판하거나 죄를 지적하는 데에 능합니다. 심지어는 우리 스스로가 관여되어 있어도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고 그 죄에 모든 책임을 덧씌워버립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은 없는 것처럼 오직 그 사람의 죄만이 드러나게 강조합니다. 그러한 일들이 가져오는 것은 서로간의 질시와 미움과 반목 밖에는 없습니다. 그 잘못을 품지 못하고 함께 애통하지 못하고 책임을 통감하지 못하는 한에는 별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무엇이 잘못인지를 지적하는 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능합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떠안고 변화와 회복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약합니다. 그런 일에는 별로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회복보다는 파괴에 세움보다는 떨어뜨리는 일이 더 쉬워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라내는 것은 쉬워도 다시 붙이기는 어려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잘라내기 시작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붙이는 것이 재주요 필요한 것이지 잘라내어 버리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라의 이러한 눈물과 기도는 더 큰 회개와 회복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변화와 발전을 낳았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을 함께 봅시다. 2절부터 4절입니다. "[스]10:2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스]10:3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스]10:4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 이러한 결과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죄와 허물과 어려움을 함께 떠안을 때에 그리고 그것을 함께 공감할 때에 우리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단지 죄를 지적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며 자복하는 것이 더 큰 공감과 동참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스라엘은 에스라를 중심으로 회개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는 이러한 회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애통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위로를 주셨고 그 위로 속에서 죄의 회개와 돌이킴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보이는 어떤 죄가 있습니까? 그 죄에 대한 애통함과 회개와 돌이키려는 노력 속에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한 변화 속에 하나님의 세우시는 은혜가 있고 더 큰 신앙이 있고 더 큰 기쁨이 있습니다. 이러한 에스라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하면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고 은혜로 충만하게 ㄷ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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