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커지고 규모가 있으며 어느 정도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면 그 다음에 성도들이 갖게 되는 한 가지 욕심은 그 교회에서 중요한 요직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하나의 사회적인 집단이 되어서 그 속에서 갖는 위치와 명예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지위가 점차 자신의 우상이 되며 인생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때로 이러한 가치관은 옆에서 부추켜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좀더 큰 직분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조언하기도 하고 어느 교회에서 그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없다면 다른 교회에서 그러한 직분을 갖고자 노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사람들이 더 큰 직분을 갖게 만들고자 부추키기도 하고 믿음과 신앙에 따른 직분이 아니라, 일단 직분을 부여하고 나서 거기에 맞는 믿음과 신앙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각과 말과 행동은 우리 가운데에서는 너무 일상화되어서 그냥 그러려니 하는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서 그러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게 될 때에 다시한번 얼마나 이렇게 잘못된 생각이 우리 가운데 깊숙히 침투해 들어와 있는지를 알게되고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에 우리 자신을 거울과 같이 비추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하나님 보시기에 점과 흠은 없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인해 잘못된 열매를 거두고 그로 인해 스스로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스스로 높아지려는 생각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부작용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매번 직분자 투표는 다양한 시험과 상처를 남깁니다. 이제는 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의외로 되지 않게 되면 좌절과 실망 그리고 환멸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때로는 공정하고 정직하지 않은 직분자 임명은 장로, 권사, 집사 직을 양산해서 장로답지 않은 장로, 권사답지 않은 권사, 집사답지 않은 집사를을 무작정 내놓기만 합니다. 이로 인한 교회의 혼란과 불명예는 전부 직분자를 올바로 임명하지 않은 잘못의 열매를 거두는 것 뿐입니다.
이러한 열매의 시작은 높아지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는 씨앗으로부터입니다. 그 씨앗을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나타나는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에게서 발견합니다.
이 어머니는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기의 아들들을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아마 자신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가정을 떠나 예수님을 따랐을 때에 그 후에 어머니는 어떤 식으로든 아들들과 교류를 계속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염려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아들들은 많아야 20,30대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아들들이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 중에서 그래도 가까이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서 과감히 그런 부탁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그러한 부탁은 다른 제자들에게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함께 고생하고 함께 제자된 자들인데 예수님 자신의 어떤 결정이나 위임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의 입김과 간청으로 자기들보다 그 두 형제가 더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기분나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한 중요한 사실이지만 그들도 마음 속으로 다들 더 높은 위치를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어머니의 부탁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제자들 가운데 만연한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에 대해 일침을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사실이며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봅니다.
" 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님께서 올리시는 곳은 보좌가 아니라 십자가였습니다.그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능욕당하며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방금 전에 그것을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어머니는 그저 하나님의 나라가 무슨 왕위요 세상의 무슨 권세인 것 마냥 생각하고 그 양 옆에 앉게 해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곳에 앉게 될 사람들은 두 명의 강도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달렸습니다. 그중 하나는 구원받았지만 둘다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게 된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어머니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그러한 위치에 올려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양 옆에 말입니다.
목사라는 직분이 무슨 대단한 위세와 능력과 부귀영화를 취하게 되는 것인줄 알고 기를 쓰고 목사가 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로라는 직분이 그저 존경과 사랑과 교회 일처리만 하는 것인줄 알고 그 직분을 받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권사받지 않으면 자존심 상하는 줄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집사라는 호칭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교회에서 높아지는 것이 그 만큼 괴로운 일이며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뢰침을 보십시오. 가장 높이 세워지는 그 피뢰침은 자신의 위세와 높음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위에서 내리는 번개를 가장 먼저 맞기 위함 인 것입니다. 가장 먼저 맞고, 가장 많이 맞고, 가장 고생하기 위한 위치가 바로 제일 꼭대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감당할 만한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자원함이 아니고 노력함도 아니며 오직 부르심이며 순종함으로만 받을 수 있는 위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어머니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20: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때로는 그 선택받은 자들이 부르심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우며 어려운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억지로라도 순종함으로 그 직분을 감당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높아진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하고 싶지 않지만 억지로 하게 되는 것, 그것이 높은 위치입니다.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잘못 알았던 것은 우리도 동일하게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높아진다는 것은 더 큰 부담과 어려움과 고생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이 있다면 감수해야 합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자들은 그 잔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줄 깨닫고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주만을 섬기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부르시는 대로 순종함으로 감당할 수 있는 위치를 부여받게 될 것입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마다 더욱 낮아져서 주님을 섬기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서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높은 직분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무 부족함 없이 주님의 일들을 잘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주안에서 더욱 겸손하게 낮아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