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는 그의 명예에 있어서 씻을 수 없는 잘못을 두 가지 저질렀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부인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지 말라고 만류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은 그에게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괴로움이었습니다. 이일로 인해 그는 어쩌면 제자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싫어하는 세력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지 공격을 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부인함으로 초래된 심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님은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가 주님을 부인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던 밤에 그에게 세번 자신을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비록 베드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자신이 예수님을 지키는 자가 되겠다고 호언장담하였지만 그는 결국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 번 주님을 부인하였고, 그로 인해 견디기 힘든 괴로움으로 고통받아야 했습니다. 다행히도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베드로를 만나셔서 그의 수치를 씻어 주셨습니다. 그에게 다가와 세번 다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변함없는 그에 대한 사역의 임무를 맡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베드로는 부족함없이 사도의 직무와 수제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두 번째 잘못의 어리석음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커다란 잘못인 주님을 부인한 것은 사라졌지만, 두 번째 주님의 뜻을 만류하려고 했던 것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진짜 잘못은 주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류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소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무심코 저지르는 잘못이 그에게는 더 심각하고 중요한 잘못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가 주님을 만류한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는 오늘 말씀에 나타난 것처럼 주님이 앞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과감하게 그 뜻을 만류하고 나섰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물론 그가 주님을 붙들고 간하여서 그렇게 하시지 말라고 만류한 것은 예수님이 살아나신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에는 나름대로 인간적인 정이 있고 안타까움이 있고 그럴 듯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당장 예수님의 호된 질책을 받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인간적인 정으로 혹은 연민으로 주께 고난이 가지 않도록 만류했다는 것이 사단의 꾀임이며 주님을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의 심각한 잘못이었습니다. 정에 이끌리고 욕심에 흔들리고 육체의 안락과 마음의 평안함만을 추구한다는 것이 이렇게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계획과 그분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계획과 그 목표를 이루려고 한다는 것이 하나님께는 그 길을 막아서는 주님의 대적인 사탄으로 나타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사소해 보이지만 심각한 잘못을 우리는 결코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주님의 계획을 방해하며 이루시려는 뜻을 막아서고 있는지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은 사도 베드로에게는 그의 사역동안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동일한 잘못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기도중 환상을 통해 부정한 짐승을 보았을 때 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부정한 짐승을 보자기에 담아 자신에게 보여주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짐승을 잡아 먹으라고 하셨을 때 그는 거부했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내가 깨끗하다고 한 것을 네가 더럽다고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그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에 그는 간신히 내키지 않은 듯이 말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10: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그는 그것을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고넬료와 그 가족에게 복음을 전파하였고 그들에게 임하시는 성령님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실수는 또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실수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증거되고 있습니다.
"갈2: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2: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베드로가 왜 이방인 성도들에게서 물러갔습니까? 그는 유대인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면서도 사람의 시선은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맨 처음 베드로가 보였던 인간적인 정과 욕심에 이끌리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었습니다. 계속 반복되면서 그의 사역가운데에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잘못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의 잘못은 우리들 가운데서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동일한 잘못에 빠지고 있습니다. 그 동일한 유혹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내면의 유혹과 외적인 유혹에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예수님의 경계에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주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주님을 따르려고 하면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러려고 노력한다면 제대로 주님을 따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길은 인간적인 정과 욕심을 따르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계속 배치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잘못을 기억하고 동일한 잘못에 빠지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인간적인 연민이나 실족함에 빠지지 말고 더욱 열심히 주를 섬기는 자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