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행하는 일 중에는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과 어려운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쉬운 일이 있고 어려운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쉬운 일이고 무엇이 어려운 일일까요? 사람마다 쉬운 일과 어려운 일에 대한 기준이 전부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기준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악을 행하는 일은 쉽지만 선을 행하는 일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마치 내리막길을 가는 것처럼 쉽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기가 살아온 대로 사는 것은 쉽습니다. 익숙한 일을 하는 것이 쉽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다 악한 일입니다. 근본적으로 악을 행하는 일은 다 쉽습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본래 하던 일이 아니고 그러한 성품이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애써 노력해야 하고 인내해야 하고 갈등해야 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냥 내려가기만 한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쉽겠지만 올라가야 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그래서 오늘 성경말씀 속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라고 말한 이유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선을 행하는 일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물론 나 자신이 선을 행하는 것도 어렵지만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더욱 포기하기 쉽습니다. 내가 아무리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결심이 있고 소망이 있어도 다른 사람은 그것을 잘 따라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이해하지도 않습니다. 받아주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늘한 응대를 여러 번 받고 나면 선을 행하려고 했던 사람도 포기하게 됩니다. 선을 행하고 싶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그러한 고민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데 누군가를 세우고자 하는데 누군가를 변화시키고자 하는데 잘 되지 않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전도하려고 하는데, 그 사람을 믿음안에서 잘 양육하려고 하는데, 그 사람을 상담해주려고 하는데, 그 사람을 섬기고 도와주려고 하는데, 그 사람을 주의 지혜로 잘 가르치고자 하는데, 그 사람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시켜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바로 여러분도 선을 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다가 낙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선을 행하다가 포기하고 싶을 때 낙심하고 그만 두고 싶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2. 그리스도께서도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일에 진력하셨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않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3절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낙심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일이 우리의 본성과 다른 사람들이 본성을 거스리는 일이기 때문에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그일을 계속 해야 합니다. 또한 그렇게 선을 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주님은 어떠셨을까요? 주님은 얼마나 낙심되셨을까요? 주님은 사람들을 돌이키고 그들이 변화를 받게 하기 까지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요?
요한복음21장에는 주님이 부활하신 다음에도 제자들이 여전히 소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린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기둥으로 세우시고자 하는 크고 아름다우신 뜻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냥 고기를 잡고 사는 평범한 어부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것을 더 친숙하고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사람은 그런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어떻게 하면 더 즐거움을 추구할까 어떻게 하면 더 유익을 누릴까 어떻게 하면 더 편한 삶을 살아갈까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한 관심사가 있기 때문에 가보지 않은 곳과 해보지 않은 일과 도달해 보지 않은 수준은 두렵고 힘든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다시 익숙하고 늘 해왔고 편한 예전의 삶으로 도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3년간 공을 들였던 제자들도 7명이나 빠져나가는데 우리가 1년을 공을 들이고 혹은 2년을 공을 들이고 혹은 3년이상이나 공을 들여도 한 순간에 도망가버리고 악화되어 버리고 원상태로 바뀌어 버리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3. 주님은 낙심한 제자들을 위해서 바다로 나가셨다.
자, 그럴 때 주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그렇게 제자들이 바다로 다 빠져나가버린 것을 보면서 주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4절 말씀을 보십시오.
“4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님은 날이 새기도 전에 바닷가에 서 계셨습니다. 주님은 밤새 바닷가에 서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이 고기를 잡고 있는 바로 그 바다에 오셔서 그들이 주님을 알아차릴 때까지 계속해서 바다에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 마음을 우리는 족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전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그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사탄이 그를 청구하였지만 그래서 가룟 유다와 함께 실족한 자가 되도록 그를 유혹하였지만 주님은 그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를 아끼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모른 척하였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났지만 주님은 다시 그에게 나타나시고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돌이키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캄캄한 새벽에 바닷가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에게 거역한 자들을 이같이 참으심이 온전하게 드러난 것은 주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산에 계시지 않고 주님은 광야에 계시지 않고 주님은 바다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떠난 제자들이 바로 바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산에 있었다면 산으로 가셨을 것이고 그들이 광야로 도망갔다면 바로 그 광야로 가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참으심은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이며 주님의 사랑하심입니다. 그들이 필요하고 유력하고 그들을 놓치면 다시 새로운 제자들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고 그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보배로 삼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애써 찾으시고 돌이키게 하신 자들은 나중에 하나님 나라의 보화가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3절에 보면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 이루어지고 나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성에 성곽에 열 두 기초석이 있었고 그 위에는 열 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이러한 영광은 바로 하나님께서 가장 결정적일 때에 그들을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거역하였을지라도 다시 불러주셨을 때에 그들은 회개하며 참회하며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참으로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4.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평강을 주신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모습처럼 낙심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누구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 15절에 보면 우리가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해야 하는 사람은 원수가 아니라 형제라고 하십니다.
“12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
물론 우리는 그 사람을 지목하고 사귀지 말고 부끄럽게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잘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원수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를 원수취급한다면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기를 원하십니다. 낙심한 제자들을 바닷가에 가서 돌이키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또한 그냥 내버려두어서도 안됩니다. 순종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그 선을 행하는 일에 우리가 낙심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낙심하지 않을 때 새 힘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때 주님이 평강을 주십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에 주님이 평강을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으려고 할 때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선을 행할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평강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인내하십시오. 더욱 참으십시오. 그리고 긍휼이 여기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십시오.
이 시간 우리가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손을 벌려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변화되어 하나님의 큰 일군이 될 수 있는 그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더욱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평강을 달라고 함께 해달라고 이시간 같이 기도합시다.
*개요
1. 선을 행하는 일은 낙심될 수 있지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도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일에 진력하셨다.
3. 주님은 낙심한 제자들을 위해서 바다로 나가셨다.
4.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평강을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