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용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 의미를 모르고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또한 믿지 않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이 불쌍하기도 하고 어리석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때에는 불쌍한 마음으로 울컥해서 열심히 말씀을 설명하려고 하기도 하지만 완강하게 반대하거나 도대체 알아듣지 못할 때에는 그냥 지쳐서 포기해버리고 맙니다. 점차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간격은 커져만 가고 때로 이러한 격차는 도저히 줄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벌어지기도 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말마다 놀러다니거나 혹은 집에서 쉬고, 유흥과 쾌락을 즐기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을 지키면서 그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삶의 방식은 절대적 가치기준이 없고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과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어보이고 절대로 따라하고 싶지 않는 고리타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에는 영원히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간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 때로는 애를 써보고는 하지만 역시 절망하거나 좌절해 버리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 커다란 간격과는 달리 조금은 넘어볼 만한 간격도 있습니다. 조금만 더 이해하고 다가서면 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해를 하기만 한다면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나갈 수 있는 소망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불신자이거나 혹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이거나 혹은 그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면 충분히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때로 아들이기도 합니다. 때로 딸이기도 합니다. 때론 가족 중 누구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그 의미를 그 가치를 그 목적을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
이 때가 사실 참 중요한 때인데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이 절망스러운 대답을 해줍니다. 잘 모르겠는데, 나는 그냥 따르고 있는데, 언젠간 알게 되겠지, 왜 그런 걸 물어보니 등등.... 우리의 궁색한 대답은 질문 속에 있는 간절한 호기심을 허망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 질문을 통해 너무나 많은 것을 알 수 있지만 우리에겐 대답해줄 말이 부족해서 그들은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그렇게 기회를 잊어버리면 그 사람은 다시는 묻지 않습니다. 대답하는 사람의 수준과 태도를 알아 버렸기 때문에 완전히 절망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가려고 노력하다보면 진정한 답을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통해 구도자를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이 만나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이제 그런 사람들에게 할수 있는 대답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성경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그 말씀을 지켜야 하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말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우리가 어떠한 자들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과거에는 멸망받을 수 밖에 없던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이전에는 죄악의 노예로 살았지만 이제는 자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마귀의 자식들이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가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의미의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는 날때부터 의로운 자들이 아닙니다. 모태신앙으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들은 죄악중에 거한 자들이었습니다. 3대 4대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집안의 자손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죄악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거듭났습니다. 세상에서부터 하나님에게로 넘어왔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었던 시기가 있습니다. 그 때 은혜를 받고 우리는 새로워졌습니다. 날 때부터 새로웠던 것이 아닙니다. 날때부터 의로웠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의 시절을 보내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어버리면 우리 죄가 사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스스로 교만해집니다. 그리고 스스로 의로운 척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죄사하심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지 정말 의로워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될 수록 새로운 삶, 열매맺는 삶을 맺지 못합니다. 자신의 죄가 사함받은 사실을 인정하면 할 수록 겸손해지고 열매맺는 삶을 살지만 그것을 모르면 모를 수록 더욱 열매없는 자, 교만한 자, 외식하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1장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없는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시작했는지를 다시금 깨닫고 죄사함의 은혜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나서 받은 은혜가 고작 죄사함의 은혜 뿐이던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는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던 그 놀라운 일 하나밖에 없었던 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인도하는 동안 수시로 때때마다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그 놀라운 일들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베푸시고"
그 놀라운 이적을 어떻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신기한 기사를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시기적절하게 하나님은 일을 이루시고 완성하셨습니다. 필요를 공급하시고 채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 민족에게, 바로에게, 그리고 모세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한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순간순간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주님은 우리를 붙드셨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낙심되는 순간에 간구할 때 소망할 때 기대할 때 기다릴 때 주님은 승리의 소식을 주셨습니다. 그런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을 기억해보십시오. 그 감격을 기억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가지고 있던 그 놀라운 간증을 떠올려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었습니다. 그분의 위로와 도우심과 능력과 인도하심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자 삶 그 자체 였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이 그러했다면 우리 마음 속에 앞으로도 그렇게 아니 더욱 승리하며 더욱 강하고 더욱 담대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만 그렇게 살고 앞으로는 힘들고 두려워하며 괴로워하고 낙심하며 살고 싶습니까? 그렇게는 못살지 않습니까? 그래서 앞으로도 더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또한 그러한 삶이 나 한사람에게서 그치지 않고 자녀들에게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실 더욱 그것을 바라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들에게 그렇게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편벽되지 않고 공평하며 변하지 않으시고 항상 동일하신 그분이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복을 누리며 항상 오늘날처럼 생활하게 하시는 것,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규례에서 떠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은혜 속에 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글의 사자가 정글을 떠나면 살 수 없듯이, 물에 사는 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 수 없듯이, 나무에 사는 원숭이가 나무를 떠나 살 수 없듯이, 우리도 그리스도를 떠나 살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그 규례를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한번 주를 떠나 살아 보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시험도 해보지 않았습니까? 어떻던가요? 잘 살 수 있던가요? 때로는 1년을 때로는 5년을 때로는 10년을 아니 그 이상도 떠나 살아보았지만 여전히 느끼는 것은 다시 돌아와야 하겠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있는 곳으로 그리스도가 있는 곳으로 우리는 다시 돌아오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가장 행복했고 가장 평안하였으며 그 삶이 바로 자신의 고향과도 같은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그 규례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켜주며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인도하는 규례 속에서 우리는 가장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들려주어야 할 마지막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의미와 그 말씀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는 사람들에게 말해주어야 할 본질적인 우리의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명하신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찌니라"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라는 말은 우리가 그것을 행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지키기만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해야할 본분을 다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의미는 성경의 목표는 그것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바로 우리의 의로움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며 어디로 나아가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고 어디로 가서는 안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이며 공부하는 의미이고 얻게되는 유익입니다.
결국, 성경은 우리에게 지도와 같습니다. 보물지도처럼 보물을 찾아나서는 자들을 돕는 수단이자 도구입니다. 그 지도를 잘 해석할 때에 정확한 목적지를 찾게 되고 그곳에 바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보물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 주고자 하시는 놀라운 사랑이 있습니다.
여름철이면 주일학교는 수련회나 성경캠프다 해서 바쁩니다. 저도 대학생시절 유초등부나 중고등부를 도와 수련회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꽤나 재미있었던 프로그램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보물찾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보물을 찾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조합해서 만든 암호를 풀어야만 했습니다. 그 때 프로그램을 준비했던 분들이 꽤나 재치있는 사람들이어서 학생들은 산을 오르기도 하고 언덕을 넘기도 하고 갖은 고생을 하면서 성경말씀을 풀면서 보물을 찾아야만 했었습니다. 비록 암호를 풀지 못하면 고생을 좀 하기도 했지만 옆에서 도와주면서 결국에는 모두 보물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보물을 찾게 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힌트를 주며 답을 알려주면서 마침내에는 목표에 이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 때를 생각해 보면 오늘도 우리들은 인생 속에서 그와 비슷한 여정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암호를 잘 푸는가, 힌트를 잘 알아차리는가에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은 무수히 많은 암호와 힌트와 방법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더 많은 축복와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이 먼저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누군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묻거든 대답해주십시오. 이 말씀은 우리의 의로움이라고. 여러분의 자녀가 왜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며 그 말씀을 따라야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라고.
우리 모두가 주의 말씀을 잘 따라나가서 그 의로움 속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보화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귀한 말씀의 의미를 잘 알려주어서 그들이 악하고 어리석은 삶을 계속 반복하지 않고 올바른 길로 나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