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나서 복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복은 물질의 복이기도 하고 건강의 복이기도 하고 감정의 복이기도 하고 사람의 복이기도 하고 지위의 복이기도 하고 환경의 복이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감사하게 되고 기뻐하게 되며 하나님을 더욱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날마다 이러한 삶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굶주릴 때 우리는 배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병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에 우리는 건강하며 다른 사람들은 우울해하고 두려워할 때에 우리는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행복한 삶이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계속해서 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는 순간이 있지만 그 복에서 떠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복은 항상 일정하지가 않아서 이러저리 옮겨다니며 다양한 활동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복을 얻기 위해서 우리도 계속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고 함께 옮겨다니면서 역시 다양한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계속 복을 얻고 또 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복을 따르기 위해 나아가는 발걸음을 그치고 과거와 현재에 안주하려는 순간, 우리는 점차 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사실 복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계속 복을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더 이상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면 복으로부터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대신 다른 것이 우리를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을 따르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조금 불편한 것이 우리가 조금 번거로운 것이 우리가 조금 인내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복을 가져다 주는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 복을 통해 우리는 무한한 복과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크게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요약되어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맹세하신 땅은 여러가지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속에는 첫 번째로 '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이 있고, 두 번째로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이 있으며, 세 번째로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이 있고, 네 번째로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가'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땅만 약속해주시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땅과 그위에 있는 살아가기에 필요한 모든 것 까지도 다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복자로서 그 땅의 모든 좋은 것을 취하여 누릴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주시는 이 모든 축복들은 한 가지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잊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추상적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사실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매우 구체적이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복과 그 인도하심을 성경말씀에 따라 잘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행하기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 따르기만 한다면 계속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축복을 받으며 그 은혜 가운데서 살 수 있습니다.
이제 성경말씀이 우리들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조심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해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분은 우리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과거에 애굽땅에서 종되었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우리가 가장 쉽게 잊어버리는 기억이기도 합니다. 조강지처를 버리는 남편은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어려울 때 도움받았던 것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도움에 감사하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그 과거에 도우셨던 하나님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혹 과거를 기억하기는 하지만 그 과거가 항상 좋았던 때만 기억한다면 역시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오히려 과거의 영화로움과 승리를 망가뜨리고 고생을 하게 하신 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애굽을 생각했을 때 그들은 그 때를 좋은 때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곳에서 자신들이 노예였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고기와 부추 먹던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그들은 슬퍼졌고 억울해졌으며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노예 속에서 자유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먹은 음식을 빼앗은 하나님께 대해서 분통을 터트렸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애굽을 떠났기 때문에 그곳에서 먹던 음식을 못먹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중요한 것을 얻었습니다. 바로 자유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일에 감사하였다면 그들은 가나안 땅과 그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노예였던 때를 기억하였다면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를 잊어버리니 하나님은 더 이상 고마우신 좋으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르치십니다.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말라'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구였는가를 잊어버리면 반드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 때의 은혜도 잊어버리고 그 때의 감사도 잊어버립니다. 과거의 우리를 기억한다면 언제든지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과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입니다. 이것은 세분되어 있지만 경외하는 것이 섬기는 것이며 그것이 또한 맹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이 마음에 관한 것이라면 그분을 경외하며 섬기며 맹세하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단지 마음으로만 가지고 있지 말고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구체적인 행동이 그분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두려워하면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두려워하면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은 마땅히 그분께 드릴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삶속에서 섬기고 예배를 통해 섬기며 봉사와 사역을 통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맹세합니다. 어떻게 살아가겠다고 결심합니다. 늘 새로운 결심과 다짐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더러워지고 불순해지기 때문에 늘 다시 새롭게 하고 굳은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해야할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고 느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실천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차라리 하나님이 주신 복을 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이방 신들을 섬기는 것보다 어려운 이유가 여기있습니다. 이방신들에 대한 경배는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편하고 쉽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즐겁고 보람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어렵고 괴롭습니다. 늘 해야하는 일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여러 가지 형식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에게로 갑니다. 그 곳에서는 인간의 종교가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여러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그분께 대해 나아가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지만 세상 우상에 대한 믿음은 더욱 간편하고 깨끗하며 즐겁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중에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편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간과한 것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무엇을 얻을 수가 없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살면 지금 당장은 좋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다시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내가 지금 겪는 주님을 섬기는 불편함보다 더 나은가요? 하나님이 약속해주시는 땅은 내가 감당해야할 책임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차라리 그러면 하나님의 복을 받지 않겠다고 생각한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성읍을 건축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집을 얻어야 하며 그 집에 필요한 물건을 채워넣어야 합니다. 우리는 먹을 수 있는 우물을 직접 파야 할 것이며 우리 자신이 직접 포도원을 만들고 감람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항상 모든 조건이 일치하지 않아서 풍성한 수확을 거둘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한 예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모든 고통과 고난과 괴로움을 감수하면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될지 안될지 모르는 두려움과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모르는 일들을 마음 졸이며 힘들게 힘들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설사 그일을 어떻게 이루었다 하더라도 만약 하나님이 그것을 더 사랑하시는 백성들에게 주고자 하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송두리째 내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은 다시 그들이 건축하지 않은 성읍을 얻을 것이며 그들이 채우지 않은 집을 얻을 것이고 파지 아니한 우물과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될 것입니다. 사실 그것들은 전부 우리가 만든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근본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땅과 하늘과 산과 들과 밭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자신이 원하시는 백성들과 사람들에게 그 환경을 허락하십니다. 가나안 민족들이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지만 그들이 그 땅의 주인이 아니었고 이스라엘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 주인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애초에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소유입니다. 지속 불가능한 점유입니다. 지킬 수 없는 환경입니다. 하나님이 버리게 하시면 꼼짝없이 다 버려야만 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라 살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잊지말고 그분을 경외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그분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 훨씬 유익한 일입니다. 다른 길은 생각할래야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이 시간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복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 복을 계속 누리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하십니다. 우리는 그래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면 늘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며 무엇을 하든지 승리할 것입니다. 혹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우리는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도 하나의 시험입니다. 과제입니다. 사명입니다. 그것을 잘 감당하면 새로운 축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계속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도하심이며 우리가 따라야 할 법칙입니다.
이 은혜를 계속 사모하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속적인 승리와 은혜를 내리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