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발전] 51골 2; 13-18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용서3Loading the player...
51골 2; 13-18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용서3_5
2022. 3. 27. 주. 주일오후. 온라인.
*개요: 골로새서 연구
[골]2: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2: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골]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용서’의 은혜는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것입니다. 기도원이나 수련회나 부흥회에 은혜받아서 눈물 콧물을 쏙 뺐다고 한다면 대개의 경우 이 ‘용서’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장 친숙하기는 하지만 또한 가장 어색하기도 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련회나 부흥회등과 같이 특별한 상황이 아닌 때에는 간절히 사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때에 비로소 나를 용서하시며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그 속에서 진정한 변화를 누리게 됩니다. 과정은 힘들지만 그로 인해서 우리 삶 속에는 놀라운 용서의 은혜가 흘러 넘치게 됩니다.
특별히 용서의 은혜가 본질적으로 어떤 은혜인가를 깨달으면 전혀 생소한 은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용서의 은혜는 하나님께 더욱 본질적으로 나아가게 되는 길입니다. 마치 목욕하는 것이 처음에는 불편하게 느끼지기도 하지만, 한번 맛을 들이면 날마다 목욕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목욕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일부의 어린아이들뿐입니다. 어른이 되면 대개 목욕하는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세상의 온갖 더러움에 찌들다보면 그렇게 깨끗하게 씻을 수 있다는 것이 더할 나위없이 기쁜 일이 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골]2: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은 범죄함과 육체의 무할례로 인해서 죽었던 우리들을 주님과 함께 살리셨습니다. 그 살리심은 그냥 살리심이 아니라 모든 죄를 사하셨기 때문에 살리신 것입니다. 병이 낫게 되는 것은 병을 모두 치료하였기 때문이고 교도소를 나오게 되는 것은 그 죄값을 다 치루었기 때문인 것처럼 다시 살아난 것은 죄를 다 사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용서가 익숙해지고 온전한 죄사함을 얻게 되면 그 용서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하지만 죄가 씻겨졌다는 것이 용서의 은혜의 전부가 아닙니다. 용서는 죄사함을 받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의 습관을 버리고 의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게 합니다. 용서는 죄의 습관의 반복을 허용해주는 장치가 아닙니다. 다시 새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용의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죄성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는 14절에 그 의미가 잘 나와 있습니다. “[골]2: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라는 것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에 의해 우리는 모든 죄의 범죄자가 됩니다. 법이 없다면 범법자도 없지만 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범죄자가 생깁니다. 이러한 범죄의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을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시는 것으로 해결하십니다. 도말하신다는 것은 영어로 ‘cancel 취소하다’의 의미가 되고 제하여 버리신다는 것은 ‘take it away 가져가 버리신다’로 해석됩니다. 이제 이렇게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신 그 율법이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님에 주목하십시오. 그것을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용서받을 만한 자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온전한 용서를 행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용서의 은혜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율법이 완성되어 집니다. 완성되기 때문에 사라지게 됩니다. 용서의 은혜는 결국은 과거의 죄의 습관을 변화시키는 것이 됩니다. 율법까지만이 아니라 율법을 넘어서는 온전한 십자가로 나아가게 됩니다. 입양을 온 자녀들이 양부모의 규칙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양부모의 사랑 속에서 살 때 진정한 자녀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행하고자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율법까지만 행하는 삶은 사라졌습니다. 새 마음과 새 언약으로 용서 속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온전히 십자가를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한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인내를 이루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 변화의 삶이 16, 17절에 나타납니다. “[골]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골]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우리가 바로 용서의 은혜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에서 빌레몬은 사도 바울의 간곡한 부탁을 받았습니다. 바로 종 오네시모에 대해서 그를 용서하고 받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으로 하면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저 억지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게 할 수 있을 뿐이었지만 십자가의 도의 은혜로 할 때 빌레몬에게 그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을 권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십자가 은혜 속에서 도말된다는 뜻입니다. 정말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용서한 뒤 잘 대해주었습니다. 진정한 용서를 깨달았기 때문에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용서의 은혜를 상기하면서 그 은혜를 통해 진정한 인내의 마음을 갖는 자들이 됩시다. 그리스도께서 용서를 통해 모든 백성을 얻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용서를 바라보며 인내할 때 많은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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