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엡]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엡]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엡]3: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엡]3: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리스도의 사랑의 규모를 아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가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그 사랑의 기준으로 볼 때 비로소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신을 보관하고 운반하며 적용하기 위해서 잘 준비된 냉동고와 냉동창고와 냉동운반차가 예비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 속에 넘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충만이란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표현이 나올 수 있을까요? 성경구절을 함께 살펴 봅시다. 19절입니다.
“[엡]3: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가 흔히 아는 충만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것은 ‘높이’일 뿐입니다. 혹은 ‘넓이’일 뿐입니다. 한 부분의 충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였지만 사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을 생각한다면 그 충만은 계속 이어집니다.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도 끝도 없다는 것을깨닫는 것입니다. 비로소 그것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다를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에게 바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막을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에게 사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바다는 사막은, 산은 한도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그 무한함을 이해할 때 비로소 본질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충만도 그와 같습니다. 그것이 비로소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충만은 삶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상황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음을 깨달을 때 충만을 알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감정이 은혜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충만은 신체에 은혜가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굴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적인 은혜를 충만하게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3장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후]3: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고후]3: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고후]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고후]3: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그가 정말로 본 것은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히 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감히 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니, 그것은 감히 그것을 전하는 말에 비하면 더욱 엄청난 말입니다. 종종 천국에 갔다오고 지옥에 갔다 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감히 전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바울은 그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고 그의 이야기는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허락하지 않으시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만큼 그는 하나님의 은사에 충만함을 얻었습니다. 그럴 때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서 고백하는 것은 그와 같은 한도 끝도 없는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충만 속에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로 충만하여진 모습입니다.
진정으로 충만을 경험하고 진정으로 충만을 사모하는 자는 그 무한함을 깨닫는 자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한번 성령의 능력을 맛본 다음에 돌아서는 자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단 한번의 경험만으로 모든 것을 해본 사람처럼 말하는 자는 진정한 충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보면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듣고 본 약간의 경험이 있습니다. 중퇴를 했거나 동종업계에 종사했었거나 뭔가 경험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부풀려서 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유익을 추구합니다. 그러한 연약한 자들과는 달리 진정으로 충만한 자들은 그 충만의 무한함에 기뻐합니다. 그 속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얻게 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엡]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엡]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엡]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결국 그 풍성한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그 마음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의 시각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 속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알 수 있습니다. 불쌍하게 바라보시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로 현실 속에서 깨닫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단순히 교회나 기도원이나 제한된 상황 속에서 얻는 은혜는 진정한 충만이 아닙니다. 충만 속에서 삶 속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관점과 시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감정 속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하게 된 모습입니다.
이러한 가장 큰 충만함을 받아서 신체의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에 은혜의 충만함을 받아 그 충만함을 나타낸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 주님의 긍휼을 이해했을 때 천사의 얼굴처럼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스데반입니다. 진정한 충만이 그의 천사의 얼굴처럼 된 모습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행]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럴 때 그는 자신을 죽이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러한 말은 그가 성령에 충만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긴다면 그것은 우리가 충만하기 때문이지 결핍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 충만하게 채워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격동시켜도 우리가 은혜로 충만하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은혜가 충만하게 차기를 사모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그 충만함으로 하루 종일 충만할 것입니다. 한주 내내 충만할 것입니다. 그 충만을 계속 사모하고 바라고 구하는 자들이 됩시다. 그래서 그 무한한 사랑의 충만함에 빠져봅시다. 그 속에서 온전한 은혜를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