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그 빛 가운데로 들어가라고 하셨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 영광으로 들어가라고 사람들을 부르셨다는 것은 이미 이전에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 영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고난을 통과해야 하기는 하지만 그 고난은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음도 역시 함께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빛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그 길로 우리를 이끄신다는 것도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이제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길로 나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영광과 빛에 대한 이야기를 숨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확신없게 이야기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표적이 없이 이야기하신 것조차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는 더 사랑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43절을 보십시오.
“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그들이 이미 맛본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기에 새롭게 이야기 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외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길도 외면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그들이 나중에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 때에는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는 이유는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빛되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은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며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을 분명하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2. 그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그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지금은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할 찌라도 때가 되면 회개할 때가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바로 그 세상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계십니다. 그들이 구원받기에 합당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구원의 열심을 우리는 46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우리는 예수님이 왜 이세상에 오셨는지를 자꾸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대신해서 사람들을 심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꾸만 가르치십니다. 내가 왜 왔는지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심판하려 함이 아니고 구원하려 함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 불순종하는 자들을 위해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악이 그대로 있을 때에 미리 그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가 아직 성장하지도 않았는데 유산을 남겨주기도 합니다. 그 자녀들은 필요하지도 않은 집과 토지를 서류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재산이나 혹은 기회들을 미리 물려받았습니다. 그 부모들이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그렇게 미리 해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개인적이거나 혹은 또 다른 은밀한 이유도 있겠지만 상식적으로 그렇게 한다고 했을 때 생각되는 이유는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바랄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중에 미리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바랄 수 없는 중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때가 되면 예수님을 바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대에 살았던 자들이 그렇고 바로 후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렇습니다.
3. 진정한 심판은 예수님이 계실 때가 아니라 예수님이 오실 때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없이 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과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미리 죄값이 주님의 피로 지불이 되었지만 자신이 그 피와 상관이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악인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마지막에는 그들을 용서하셨던 바로 그 예수님에 의해서 심판받습니다. 그 심판은 그들 스스로 거부한 사죄의 은혜로 인해서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았던 바로 그 거부로 인해서 그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죄와 함께 불순종의 죄까지 심판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자신이 받았던 용서가 바로 자신이 지은 죄값이 될 것입니다. 용서가 받아들여지지 못할 때 그 거부는 더 큰 죄악이 되어서 그 선택으로 인해 마침내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거부할 수 없는 거부해서는 안되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하나님의 명령이자 권세이기도 합니다. 50절을 보십시오.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슴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허락받은 그대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니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듣지 않는 것이 되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노여움을 받게 됩니다. 그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빛을 따라 그 영광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4.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구원을 실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왜 실족하게 되었는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실족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매우 가까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담대하고 용감하게 나섰지만 실족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실족하게 된 것은 비자들이 그를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예수님의 정말 제자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딜레마는 여전히 있습니다. 제자일수록 더 시험당합니다. 교회성도일수록 더 유혹이 많습니다. 세상은 더욱 제자들에게 집요하게 달려듭니다. 그래서 그것을 인정하면 예수님처럼 죽여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 길을 갈 것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 시험에 전부 실족하게 됩니다. 나도 그 당이라 그러니 나를 죽여라고 하지 않는다면 전부 나는 그분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판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에게 선택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의 길을 두려워해서도 안되고 빛으로 나가기를 게을리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면 어느 새 비자들이 여종들이 다가와 네가 예수의 제자냐라고 색출해내기 시작합니다.
오늘도 함께 기도할 때에 우리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래서 담대하게 희생과 고생을 감수하여 진정한 주의 영광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능력을 주셔서 주님을 바라봄으로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제목으로 기도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