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며 고무적인 부분입니다. 그동안 매번 명절 때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를 원하였지만 번번이 예수님은 거절하셨고 또한 들어가셔도 조용히 들어가시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존재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져 있다 하더라도 신비감에 싸인 분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 입성을 계기로 해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문에 대해서 온전히 알게 되었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게 되었으며 예수님에 대한 커다란 기대감과 소망에 들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메시야였으며 그들의 구원자요 해방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사람들은 기뻐서 환호하였고 큰 무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이 입성하시는 것을 환영하였습니다.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시는 것을 환영하는 것처럼 오늘날 성도들도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삶에 오시기를 바라고 찬양합니다. 간절히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또한 그럴 때 부르짖어 외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또한 주님이 오셔달라고 간절히 간구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자신의 삶에 들어와주시기를 바라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주님은 세계와 그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다스리십니다. 그분께는 권세와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와주신다면 그것은 놀라운 능력으로 채워진다는 뜻입니다. 도우시고 힘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며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나귀새끼를 타고 오셨고 이는 예언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모습은 사람들의 기대와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이 오시는 것이니까 뭔가 특별한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의 모습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그것도 준비되어진 것이 아니라 우연히 만나서 타셨습니다. 나귀도 성년이 된 나귀가 아니라 한번도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는 어린 나귀였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왕의 행차나 입성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화려할 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화려함 속에서 우리는 왕이 베푸실 자비와 긍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왕이 수행하는 사람도 없고 보잘것 없는 행색이로 나아온다면 적잖이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무능력한 왕이 어떻게 나를 구원한단 말인가 생각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기대하는 도움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에 미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하나님의 도우심은 더 큰 것이었는데 그런 도움을 주시지 않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정말 도와주실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도 듭니다.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 듯한 일의 되어짐을 보면서 낙심도 될 것입니다.
3.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오신다 하더라도 감사함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낙심이나 실망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 알지 못하고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놀라운 일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바로 예언된 그대로를 실천하고 있으셨던 것입니다.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주님은 바로 스가랴 9장 9절에 예언된 그대로를 실천하고 계셨습니다.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는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그는 겸손하여서 자신을 낮추고 친밀하게 다가오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 겸손함은 궁극적으로는 나귀새끼를 키우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장 자비롭고 가장 은혜로우신 주님의 모습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사실은 그 백성들에게 가장 은혜로운 것이었음은 성경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다윗에게 주신 은혜는 그가 사울의 미움과 시기 속에서도 귀한 왕으로 자라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에스더가 삼촌 모르드개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바울이 회개한 후에 안디옥 교회의 성경교사가 된 것은 그가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자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은 이러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고 우리에게도 나귀새끼를 타게 하십니다. 그 은혜를 감사히 받을 때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4. 왜냐하면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오셨고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주님이 타고오신 나귀새끼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사람들은 전혀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예수님이 행하셨던 일들에 대한 것입니다.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온 것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이 얼마나 더 큰 역사를 이루실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놀라운 일이었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흥분하였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도 우리의 예상과 다르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사로를 살리셨던 것에 주목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의 생각 그 이상을 바라보십니다. 우리의 계획한 것 그 이상을 꿈꾸게 하십니다. 그것은 더 큰 나귀새끼가 아니라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일입니다.
그 일들에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더욱 바라봅시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일보다 더 놀라운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러한 일을 이루실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 왕이 나귀를 타고 오심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을 따르십시오. 그래서 주님이 우리 삶에서 죽은 자를 살리실 것을 바라보고 간구하며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이러한 제목으로 다같이 손을 들고 주님을 부르면서 뜨겁게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