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때 예수님은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병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게 되는가 하면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우리는 이것이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을 그 이후의 사건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나사로의 병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일까요?
이러한 난해함은 지금도 진행됩니다. 우리는 지금도 어느 누군가의 병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혹은 당면한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이야기에 대해서 그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까지 들어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이야기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까요?
2.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이유는 주님께서 그를 깨우러 가시기 때문이다.
동일한 말씀을 예수님은 소경에 대해서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십시오.
“요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는 것이며 그것이 영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병에 들었거나 소경되었거나에 상관없이 어떤 문제에든지 적용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사로에게 하나님이 행하고자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소경에게 하나님이 행하고자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것은 깊은 의미를 염두에 두고서 하신 말씀이었지만 제자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잠들었으면 그냥 놔둬도 스스로 깰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이제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러 가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죽게 내버려 둔 것은 그를 다시 살리기 위함이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죽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도 다시 살리시는 일을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3. 예수님은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에게 어떠한 영광이 있는지를 보이고자 하셨다.
그런데 이것은 더 큰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단지 육체적인 죽음뿐만 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죽음이자 죄의 죽음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미의 확장은 앞서 소경의 경우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단지 날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더 큰 의미를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9:39 에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로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은 영적인 소경이 영의 눈을 떠서 누가 그리스도인가를 깨닫게 하신다는 의미였습니다. 소경의 사건에서도 영적인 의미를 설명하시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며 무엇이 영광이 되는가를 알려주십니다.
이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이 하시는 일, 그분이 영광받으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웠던 자가 눈을 뜨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그것이 어떻게 영광받으시는 일이 됩니까? 그것은 영적으로 사망에 빠진 자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자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은 나사로를 일으켜 세우심으로 나타내십니다. 나사로를 불러 나오게 하심으로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께 무엇이 영광이 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교회를 크게 짓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수를 많이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소경의 눈을 뜨는 것이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를 소원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매달리며 주님께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소경된 자가 있다면 죽은 자가 있다면 그로 인해서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우리는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눈이 뜨지 않아도 영적인 눈이 떠집니다. 목숨을 건질 수 없어도 영혼은 건질 수 있습니다. 눈이 뜨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고 영혼을 구원받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저는 말기 암환자를 위해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병은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4. 우리는 살리려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죽으러 갈까봐 두려워하는 도마의 모습이 되지 말아야 하겠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 일을 위해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주님은 지금도 소경된 자들과 사망한 자들에게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들에게로 함께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영광을 보지 못할 때 그 하시는 일을 생각지 않을 때 그러한 인도하심은 그저 두렵고 괴로운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도마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되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믿음없던 도마에게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자는 말씀은 죽으러 가는 것과 동일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믿음없음이었습니다. 주님은 지금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살리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들이 아니라 살리러 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됩시다.
눈을 뜨게 하고 영을 살게 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일들을 준비하며 동참하는 자들이 됩시다.